봉화(鳳花)리는 봉촌(鳳村) 마을의 봉자와 삼화(三花)마을의 화자를 따서 이름 지었다하며, 옛 지명은 삼거리라 불렀다. 전국에는 여러 곳에 봉화마을이 있지만 대부분이 옛날 봉화(烽火)가 있었던 마을이지만 이곳은 특이하다. 봉촌 마을은 옛날에는 금산아래 깊은 골짜기에 있어 내산이라 불리던 곳이며 새 봉(鳳) 마을 촌(村)자를 쓰니 고유 지명은 새마을이다. 새들이 사는 산골 마을이라니 운치 있는 지명이지만 바다와 접해 있지 않은 산골마을이다. 마을 지명에 새 봉(鳳)자가 들어가는 곳은 봉황이라는 뜻보다는 새로 생긴 마을(新村)을 뜻하는
금송(金松)리는 마을 앞의 산모양이 거문고와 같다하여 금성(琴城)이라 불리었으나 이름이 어렵다하여 금송으로 바꿨다고 한다. 한때는 금송(錦松)으로도 불리었다, 금송리는 쇠 금(金) 소나무 송(松)자를 쓴다. 금송은 일본 남부 고야산이 원산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나무이다. 공주 무릉왕릉의 관재로 사용 될 만큼 고급 자재로 쓰이긴 하지만 일본이 원산이라는 이유 때문에 현충사 안에 있던 금송을 다른 곳으로 옮겨 심는 일도 있었다. 그런 금송을 마을 이름으로 바꿨다고 하니 이해가 안 되며 우리나라 고유종인 금송(錦松)으로 바꿔야 할
영지리는 선령곡(仙靈谷)의 영자와 약제인 지초(芝草)의 지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으며 한자로는 신령 령(靈) 지초 지(芝)자를 쓰며 영지버섯이 생각나는 마을 지명이다. 주민들은 사는 마을이 신선이 사는 신령스러운 땅, 영지(靈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지명이 아닐까? 선령골은 소슬령 솟을령과 같은 말로 솟다와 섰다가 같은 의미를 가진 지명으로 추정을 한다.시문(矢門)리는 시문동(矢門洞), 살문이라고 하며 한자로는 화살 시(矢) 문 문(門)자를 쓴다. 고려 말 백이정 선생이 내려와 살면서 홍살문을 세웠기 때문에 그 때부터 시문
난음(蘭陰)리는 난현내리(蘭縣內里)로 불리던 곳으로 신라시대 전야산군의 속현이었던 난포현의 중심 마을이다. 난포, 난읍, 난부(蘭府) 등으로 불리었다. 고려 때 중국 명사가 이곳의 지형을 보고 난음의 뒷산이 난초꽃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그 산을 난화산, 난화방(蘭花坊, 나암방)이라 부르고 산 아래 마을을 난음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신라초기에는 내포(內浦)현으로 불리다가 경덕왕이 난포현으로 고쳐 남해군의 영현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 때 명사가 지었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내포현이 난포현으로 바뀐 연유
석평(席坪)리는 다정리와 무림리 사이에 있는 넓은 벌말로 건너편 난음리에 있는 비자당의 동산이 배를 엎어 놓은 모양과 같고 배의 돛이 들판을 덮은 것 같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석평리는 돗 석(席) 들 평(坪)자를 쓴다. 우리말 이름은 돗들이다. 돗은 돌, 덫, 돼지를 이르는 고어이지만 배의 돛과는 다른 말이다. 훈몽자회에서는 돗 석(席)자는 돗자리를 말하는 것으로 돗틀로 짠 돗자리와 가는 끈으로 엮은 자리로 구분하였다. 드물게 배에 다는 돛을 뜻하기도 하지만 돛은 한자로 돛 범(帆)자가 따로 있고 돛단배를 범선이라고 한다.
다정리(茶丁里)는 괴음산에서 흘러내린 입현천과 송등산에서 흘러내린 다천천 사이에 있는 마을로 들에 작설차(雀舌茶)밭과 정자가 있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다천과 금석마을을 합하여 다정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옛 지명은 다정천리(茶亭川里)였다. 다정천리는 차 다(茶) 정자 정(亭) 내 천(川)자를 쓰는 마을로 물이 흐르는 냇가에 차나무가 많았거나 정자가 있었던 마을로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물이 귀해 모린내라 불리는 냇가에서 차를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며 지금은 차 다(茶) 고무래
마을 뒤에 있는 호구산(虎丘山)에서 흘러 내려오는 영오고랑에는 폭포와 작은 못이 있다. 이 소(沼)에 용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용소리는 한자로는 용 용(龍) 늪 소(沼)를 사용하여 용이 사는 늪이 있는 마을이다. 용소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에 깊이 파인 웅덩이를 말하며 용이 사는 골짜기는 용추(龍湫)라고도 한다.호구산에 있는 용문사(龍門寺)는 하동 쌍계사의 말사로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한 금산 보광사의 후신이다. 1660년에 남해 향교와 입구가 마주본다는 이유로 백월이 호구산으로 이전하여 용문사로 하였다고 한다. 후에 탐
설흘산(雪屹山)의 옛 이름은 소흘산(所訖山)이었다. 소흘산이 언제부터 설흘산으로 바뀌었으며 무슨 이유로 바뀌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고 알려주는 자료도 없다. 지금의 설흘산은 가천의 다랭이마을과 함께 트래킹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정상에 오르면 탁 트인 남해의 멋진 풍광은 등산객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명소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남쪽의 해안선은 소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우며 산정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은 장관이다.소흘산의 기록은 조선 세종 30년(1448) 의정부에서 병조의 첩정에 의거하여 소나무를 사사로 베지 못
석교리의 옛 지명은 마을 입구에 장승이 있어 장승들이라고 불렀다. 마을 앞에는 치천이라는 큰 내가 있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불편하고 큰물이라도 나면 임시로 만든 다리나 징검돌이 떠내려가기도 하였다. 400년 전 평산현에 현령이 주재 할 때 박 장군이란 장사가 있어 큰 돌로 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통행을 하게 하였다.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지명을 석교라고 하였으며 석교리는 돌 석(石) 다리 교(橋)자를 쓰니 돌다리 마을이다. 경지정리 작업으로 돌다리가 필요가 없어지자 다릿돌을 마을 앞 공덕비가 있는 자리로 옮겨 놓았다. 전국에는 15
선구리는 잣나무가 무성한 어촌으로 배가 많이 드나들어 잣나무 백(栢) 수풀 림(林)자를 백림(栢林)으로 불리다가 선구로 고쳐 부른 마을이라고 한다. 다른 지명 유래는 신선이 놀던 곳이라 하여 선구(仙仇)라고 하였다고 한다. 선구리는 배 선(船) 원수 구(仇)자를 쓰고 우리말 지명은 배금, 배구미라고 읽었다. 이는 백림에서 와전 된 것이라고 하지만 백림은 배기미의 한자표기로 본다. 백임-배김-배기미로 바뀐 것일 뿐이다. 선구리의 옛날 지명은 선구미리(船仇味里)였으며 이는 배를 한자로 옮기면서 선자를 사용한 것은 누구나 알 수가 있다.
홍현리는 옛날에는 물직리로 불리던 곳이다. 바다에서 소라가 많이 잡혀 라라(螺螺)라고 부르다 지형이 무지개 같다하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홍현으로 지명을 고쳤다고 한다. 홍현리는 무지개 홍(虹) 고개 현(峴)자를 사용하고 있어 무지개 고개마을이다. 그러나 200년 전의 지명은 물직리였다. 물직리는 말 물(勿) 곧을 직(直)자를 쓰므로 곧지 않다는 뜻이므로 구불구불한 마을이라는 지명이다. 당시에는 어떻게 읽혔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무지기나 물지기로 불리었을 것으로 추정을 한다. 물지기가 무지개와 비슷함으로 후에 홍현으로 바꾼
우형리는 우형동리로 불리던 마을로 마을의 지형이 소를 닮았다고 하여 지은 지명이라고 한다. 마을 뒷산은 송아지 다섯 마리가 뛰어가는 형상이라 오독산이라 하고 천상사 안쪽에 있는 등은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이라 우왓등(牛臥嶝)이라 불러 소에 관한 지명이 많은 곳이며 맞은편에는 우지막골이라는 마을도 있었다. 그러나 구글 지도를 보면 마을의 형태가 소를 닮았다는 것은 확인하기가 어렵다.우형리는 소 우(牛) 꼴 형(形)자를 쓴다. 당연히 우리말은 소꼴 마을 이다. 쇠꼴은 소 모양으로 풀이 할 수 있지만 소를 먹이는 꼴(소먹이 풀)을 뜻하기도
평산포는 옛 지리지에는 평산, 평산포, 평산현, 평산포영, 평산폐현, 평서산, 서평으로 불리던 곳이다. 신라시대부터 서쪽 대양을 지키는 군사 요충지 이었으며 남해군의 전신인 전야산군의 영현이었다. 신라의 평서산현은 일명 서평이라고 불리었는데 이는 가야나 신라의 서쪽 국경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본래 신라 초기에 평서산현(平西山縣) 또는 서평현(西平縣)이었으나, 경덕왕 때 평산현으로 고쳐 남해군(南海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고 한다. 지리지에도 평산폐현은 현 남쪽 25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고려 초 왜구의 침입으로 이 지역이 폐허가
가화포리(加火浦里)의 우리말 지명은 더불개, 더우개 이다. 천황산 남녘 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로 임진성 안쪽 손목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때 부르던 지명이다. 가화포는 더할 가(加) 불 화(火) 개 포(浦)자를 쓰니 불이 덮은 개를 의미한다. 더불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조선 태종 때라고 전하니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일부 자료에는 가대포리(加大浦里)로 기록된 곳도 있지만 가화포리의 잘못된 표기로 생각된다. 후에 가화포는 인구의 증가에 따라 상·하가화포리로 나뉘고 상가화포리는 앞 두 글자를 떼어서 상가리(上加里)가 되고, 마을의
대정리(大丁里)는 큰 정자나무와 정자가 있어 큰 정자마을로 불리다가 대정자리나 큰 정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의 밭에 있는 지석묘는 오래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곳임을 알려 주고 있다. 지금도 동정, 남정, 금곡을 대표하는 중심마을이며 옛날에는 대정 사창(社倉)이 있던 마을이다. 한자 표기는 큰 대(大) 장정 정(丁)자를 쓰지만 옛날에는 큰 대(大) 정자 정(亭) 아들 자(子)를 쓰거나 큰 대(大) 정자 정(亭)자를 써서 큰 정자가 있었던 마을을 뜻했다. 지금은 뜻을 알 수가 없는 지명이 되었다.정자리의 지명은
서호리의 옛 지명은 와야동리였다. 후에 마을 앞을 흐르는 큰 개천이 서쪽으로 흘러 서상 앞바다에 이른다고 서호리로 바꾸었다고 하며 한자로는 서녘 서(西)와 호수 호(湖)자를 쓴다. 서쪽에 호수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지만 호수는 땅이 움푹 파여 자연적으로 형성된 내륙 수면으로 못보다는 깊고 넓게 물이 고여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곳은 그런 곳이 없다.물이 고여 있는 곳은 크기별로 구분하여 큰 것부터 호수(湖) 못(池) 못(潭) 못(淵)으로 구분을 하였다 백두산 천지 한라산 백록담 천제연 등이 그러한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인위
서상리(西上里)는 서녘 서(西) 위 상(上)자를 쓰며 서면의 상등마을이라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지형으로 볼 때에도 높은 들이 있는 곳이며, 남해와 여수를 오가는 여객선의 축항과 면사무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옛날 이 지역에는 호포해촌(湖浦海村), 유점리(柳店里), 서상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서상리만 남았다. 호포해촌은 마을에 호수 같은 호포(湖浦), 호을포(湖乙浦), 홀개로 불리던 포구가 있어 사람이 살기 좋은 갯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지명이다. 호포는 왕조실록에는 호을포(呼乙浦)로 남아있어 호수가 있었다기보다는 호을포
작장리는 신라 때에 목마른 용이 이곳에 와서 물을 마시고 승천하였다는 전설에 따라 갈용고지(渴龍顧地)라고 불리던 마을이라고 한다. 그리고 명당자리 중 갈용음수형(渴龍飮水形)은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상으로 고관대작이나 큰 부자로 살 수 있는 명당이라고 하니 욕심을 낼 만한 땅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갈용고지는 어떻게 작장리가 되었을까. 작장리(勺長里)는 200년 전 기록에는 작장대리(酌長坮里, 勺長大里)로 되어 있어 지금의 작장리와는 소리는 같지만 뜻은 다르다.작장리의 우리말 지명은 가랑고지, 가룡고지로 불리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
노구리(蘆九里)는 옛날부터 구월이면 바닷가에 갈대꽃이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는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우리말 지명은 갈금이다. 지금의 노구는 갈대 노(蘆) 아홉 구(九)자를 쓰지만 원래는 노구미리로 갈대 노(蘆) 원수 구(仇) 맛 미(味)자를 썼다. 九나 仇味는 한자의 뜻보다는 우리말 구미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구미나 기미는 지형이 들어간 곳을 의미하는 고유어로 구미는 기미나 금으로 변하기도 한다. 따라서 노구미를 갈구미나 갈금으로 읽는 것은 한자의 뜻과 소리를 빌려왔기 때문이다. 노구미리는 육지로 쑥 들어간 곳에 있는 갈
게재곡의 한자 지명은 해치리(蟹峙里)였으며 후에 현촌으로 바꿨다. 해치리는 게 해(蟹) 재 치(峙)자를 쓴다. 당연히 우리말 이름은 게재이다. 지명의 유래는 마을의 지형이 물에 사는 게를 닮았다거나, 계곡에 게가 많아 가을이 되면 게를 낚는 사람들이 많아 부르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재가 험해서 게처럼 기어 올라가는 재라는 뜻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게재는 망운산과 삼봉산 사이에 있는 높은 고개로 서면과 고현면을 가르는 경계이다. 재의 동쪽에 있는 웃게재는 현촌(峴村)으로 부르고, 아랫게재는 도산(稻山), 서북쪽에 있는 중개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