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에 전야산군의 중심지였던 설천면 비란리에서 시작한 남해마실 나들이가 2년 동안 남해군을 한 바퀴 돌아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승지인 선소리에서 끝을 맺었다. 역사의 기록으로 보면 외세의 침입으로 한 자리에서 터를 잡지 못하고 유랑생활을 하다가 다시 돌아와 터를 잡고 살만 하니 왜구의 대대적 침입으로 피난도 가지 못하고 숨어서 살았던 조상들의 삶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남해인 특유의 근면성과 생존력을 바탕으로 오늘에 이르렀고 후손들은 풍요로운 삶을 유지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전쟁에
차산리는 신라 때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으며 처음에는 윤산(輪山)이라 부르던 것을 차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차산리는 수레 차(車) 뫼 산(山)자를 쓰며 윤산은 바퀴 륜(輪) 뫼 산(山)자를 쓴다. 후에 주민들이 늘어나서 마을이 커지자 가운데 위치한 마을을 가운데 중(中) 마을 촌(村)자를 써서 중촌(中村)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마을은 동녘 동(東)자와 뫼 산(山)자를 쓰서 동산(東山) 또는 고유지명인 동뫼라고도 한다. 산으로 막힌 골짜기 안에 있는 골안 마을은 골 곡(谷)자와 안 내(內)자를 쓰서 곡내(谷內)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평현리에는 200년 전에 평리와 평고개리(平古介里)가 있었다. 평현은 읍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평현, 평곡, 평고개로 불리던 곳으로 평평할 평(平) 고개 현(峴)자를 써서 고개가 높지 않고 비교적 완만한 곳이라는 의미이다. 마을의 주민이 늘어나자 양지 편과 음지 편으로 나뉘었고, 양지마을은 양지 편에 있는 마을로 웃담이라고도 한다. 평현 동쪽 길가에는 이 씨 집안의 열녀각(㤠女閣)이 있으며. 1737년에 세운 “烈女私奴林芬善妻蓮臺之閭(열녀사노임분선처연대지려)” 비가 있다. 진주진관 남해현지에 있는 내용을 보면, ‘김 씨의 딸이 신
입현리(笠峴里)는 다른 한자로는 입고개(笠古介)마을로 삿갓 립(笠) 고개 현(峴)자를 쓴다, 따라서 삿갓고개나 갓고개를 이르는 말이며 갓곡의 된 발음이 까꼭으로 되었으며 큰 갓곡(大笠峴)과 작은 갓곡(小笠峴)이 있다. 작은 갓곡은 봉현(鳳峴)으로도 불리었다고 한다. 고개(古介)는 우리말 고개를 한자의 음을 빌려서 표기한 것이다.갓과 삿갓은 모양이 다른 물건이다. 삿갓은 대나무나 부들, 갈대 등으로 만들어 비나 햇살을 피하기 위하여 사용하였으며, 갓은 말총돼지털, 대실 등으로 만든 것으로 양반들의 의관 이었다. 따라서 고개의 모양을
심천리는 마을 앞에 흐르는 내가 깊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깊을 심(深) 내 천(川)자를 쓰며 고유지명은 ‘지푼내’이다. 지푼내는 깊은 내의 방언이며 망운산에서 발원하여 오동뱅이를 거쳐 들 중간을 지나 바다로 흘러가는 내이지만 고지도나 지리지에는 표시되지 않고 지금은 동산천이라고 부른다. 영동군의 심천면, 경북 칠곡의 심천리도 같은 한자를 사용하며 주변에 강이 있어 ‘깊은 내’라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고현이나 설천 사람들이 읍내로 들어가려면 여산마을을 지나 후미진 골짜기에 새로 생긴 풍산 마을을 만난다. 이 마을을 지나 첫
북변리는 남해 읍성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북변리의 옛 지명은 성북리(城北里)였다. 성북리는 성 성(城) 북녘 북(北)자를 쓰므로 성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성뒤라고도 하였다. 후에 성북리는 북변리(北邊里)로 바뀌었으며 북녘 북(北) 갓 변(邊)자를 쓰며 북문외리(北門外里)라고도 불리었다.유림리의 옛 지명은 교동리(校洞里)였다. 교동리는 학교 교(校) 마을 동(洞)자를 쓰니 조선 시대에 교육기관이었던 향교가 있는 마을 이다. 지금도 봉황산 남녘에 향교가 있으며 해마다 공자를 추모하는 제사를 지낸다. 후에 교동리는 유림동리(
창선도(彰善島)는 남해군에 있는 섬으로 우리나라에서 아홉 번째로 큰 섬이다. 면적은 54㎢이고, 해안선 길이는 107㎞이며 동서 간 길이는 11.5㎞이고, 남북 간 길이는 10.5㎞이다. 1980년에 창선교를 통해 남해도와 연결되었으며, 2003년에는 창선-삼천포대교를 통해 사천시와 연결되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만입한 동대만(東大灣)이 섬을 동서로 거의 이등분하며, 서쪽이 동쪽보다 약간 길고 크다. 서부는 동부보다 험준하며 산지가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 있다. 서남부 중앙에 대방산(臺芳山, 468m)이 있고 동부는 망치산(望峙山,
진동리(鎭洞里)는 남해군으로 이속되면서 적량, 대곡, 장포마을을 합하여 새롭게 지은 이름으로 둔칠 진(鎭) 마을 동(洞)자를 쓰니 군사가 주둔하던 진이 있었던 마을이다.적량리(赤梁里)는 동쪽에서 해가 뜨면 성이 햇빛에 붉게 반사되는 곳이라거나, 해가 뜨면 붉은 빛이 반사되는 마을에 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아 붙여진 지명이라 전하며 붉을 적(赤) 들보 량(梁)자를 쓴다. 적량 마을 앞에는 인공으로 바다를 파내어 만든 선박 피난처인 굴항(굴강, 掘江)이 있었으나 지금은 훼손이 되어 흔적만 볼 수가 있다. 또 굴강을 만들면서 생
오용리(五用里)는 가인리 남쪽 맞은편에 있는 마을로 주변에 있는 정신날 끝, 정시끝, 솥머리끝 고개끝 동뫼끝의 지형과 하천을 다섯 마리의 용에 비유해 다섯 오(五), 용 용(龍)자를 써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고유지명은 오링개라 하며 이는 바다가 매립되기 전 해안의 이름인 오룡포(五龍浦)가 와전 된 것으로 보인다. 윗마을인 연곡(蓮谷)마을은 웃오링개, 아랫마을은 아래오링개라고도 불렀다. 마을에서는 가뭄이 심할 때는 오용천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여 남쪽마을이 이겨야 비가 온다는 설이 전해 온다. 일제 때 마을에
상죽리(上竹里)는 마을에 큰 대밭이 있는 대밭 마을이다. 대밭 위쪽에 있는 마을은 상죽이라 하고 위 상(上), 대 죽(竹)자를 쓰며, 대밭 아래쪽에 있는 마을은 아래 하(下), 대 죽(竹)자를 써서 하죽이라 한다. 옛 자료에는 호음동(好音洞)과 죽전동(竹田洞)이 있었으며 지금의 상죽리는 호음동, 웃 대밭(上竹,동산동), 아래 대밭(下竹), 3개 마을을 합하여 만든 지명이다. 일반적으로 마을은 시간이 지나면 주민이 늘어나 분동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상죽리의 경우는 축소 된 것으로 보아 자연재해나 출향하는 호수가 늘어나 주민이 줄어든
동대리(東大里)의 옛 이름은 동한재이다. 서쪽 산 너머 서대마을과 연결되는 큰 고개를 한재라고 하며 한은 대(大)의 우리말이다. 한재의 동쪽에 있어 동한재가 되었으며 한자로 표기하여 동대(東大)가 되었다, 고개 아래 골자기 일대를 한재골 또는 한재마을이라한다곤유리(昆遊里)는 당항과 곤유마을 아래에 있는 개에 계절이 바뀌어도 옮겨 가지 않고 사는 새가 있었는데 새의 이름이 곤니라고 해서 지명이 되었으며 점차 변하여 곤유가 되었다고 한다. 고유지명은 고내개, 고니개, 괘개라고 한다. 한자 지명은 처음에는 고니 곤(鵾) 놀 유(遊)자를
대벽리(大碧里)의 고유지명은 벽재, 벽티로 불리었으며 1906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벽치동(碧峙洞)이었다. 마을 뒤에는 금오산과 상투산이 마주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두 갈래로 나뉘는 고개가 있다. 그곳의 지형이 두 산에 막혀 벽과 같다하여 벽 벽(壁)자를 써서 벽재라고 하였다는 설과 나무가 울창하여 사철 푸르다고 푸를 벽(碧)자를 쓰고 두 산 사이를 넘는 재(고개)가 있어 벽재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그 곳에 있는 큰 마을을 큰 벽재라고 하며 연태산과 대사산 사이 골짜기에 있는 안골 마을이다. 작은 마을은 작은 벽재라고 부르다가
옥천리(玉川里)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골이 깊고 물이 많은 곳이다. 고유지명은 막은 골이라 하며 지명의 유래는 골이 마흔 개라서 마흔 골이라는 설과 목장의 관리를 위해 토성을 쌓아 막은 골이라는 설 등이 있지만 토성(土城)을 쌓아 골을 막았다 하여 막은 골이 마흔 골로 된 것으로 보인다, 경상도 지리지(地理志)와 진주목지(晉州牧誌)에는 막은동(莫隱洞)으로 남아있는 오래된 지명이다. 1906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맑은 시냇물을 상징하는 옥천으로 바꾸었으며, 옥천리는 옥 옥(玉) 내 천(川)자를 쓴다. 옥구슬 같은 맑은 냇물이 흐르는
당저(堂底)리는 당집 아래에 있는 마을에 붙여진 이름이다, 집 당(堂) 밑 저(底)를 쓰며 고유 지명은 당밑, 댕밑이라 한다. 옛날 창선의 조세와 특산물을 모아 해창이나 보미창을 통하여 운송할 때 한성까지 탈 없이 운송케 해달라는 제(祭)를 올리는 당집이 있었고 그 당집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당밑마을이다, 아직도 당집터가 남아있고 커다란 고목이(당산목) 있으며 마을에서는 매년 동짓달 그믐날 불을 밝히고 풍농 풍어를 비는 동제를 모신다고 한다.고종8년(1871)에 발간한 진주목의 목장지(牧場誌)편에는 마을 이름이 해창동(海倉洞)이었
남해의 진산은 망운산(786m)이다. 망운산은 남해도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남쪽해안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반면 금산(681m)은 망운산보다 낮은 산이지만 명산으로 알려져 남해를 대표하는 산이 되었다. 금산은 비단 금(錦)자와 뫼 산(山)자를 씀으로 비단 산이라 할 수 있지만 금자는 비단이라는 뜻 외에 아름답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금산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에 있다. 행정구역으로 충남에 금산군이 있고 지역명이나 산 이름으로 쓰이는 곳이 10곳 이상이 있으며, 이름의 뜻은 비단같이 아름다운 산이거나, 옥
상주(商州)리는 미조항과 더불어 군사 요충지로 지형이 상(尙)자를 닮아 이름 지었다거나 신라 때 원효대사가 보리암에 머물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어디냐고 묻는 질문에 산하상주(山下常住)라고 대답 하였는데 상주(常住)가 뒤에 상주(尙州)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작은 마을 이름에 고을 주(州)자를 쓰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욕심 없이 산 아래 내가 사는 곳이 좋다는 지명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상주는 오히려 상(尙) 고을 주(州)자를 쓴다. 삼한 시대부터 중요한 지역이었던 경북 상주와 같은 지명이다
미조(彌助)리는 미아산 아래 있는 마을이라 이름 지었다고 하나 미아산은 없고 망운산(望山)이 있다. 나이든 사람들은 메지목, 메진목이라고 하며 본촌 또는 본말 이라고도 한다. 미조리는 그칠 미(彌) 도울 조(助)자를 쓰며 미륵불이 도와줄 마을이라고 설명을 한다. 어쩌면 왜구의 침입이 너무 많아 미륵의 도움을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남아있는 고유지명에서 알 수가 있듯이 목이 이어지지 않고 끝맺음한 곳이라는 뜻과 메다 메우다 메지내다와 연관된 지명이 메진목이다. 조선시대부터 관방을 지키는 군사 요충지로 첨사가 파견되어 다스리기도 하였으며
봉화(鳳花)리는 봉촌(鳳村) 마을의 봉자와 삼화(三花)마을의 화자를 따서 이름 지었다하며, 옛 지명은 삼거리라 불렀다. 전국에는 여러 곳에 봉화마을이 있지만 대부분이 옛날 봉화(烽火)가 있었던 마을이지만 이곳은 특이하다. 봉촌 마을은 옛날에는 금산아래 깊은 골짜기에 있어 내산이라 불리던 곳이며 새 봉(鳳) 마을 촌(村)자를 쓰니 고유 지명은 새마을이다. 새들이 사는 산골 마을이라니 운치 있는 지명이지만 바다와 접해 있지 않은 산골마을이다. 마을 지명에 새 봉(鳳)자가 들어가는 곳은 봉황이라는 뜻보다는 새로 생긴 마을(新村)을 뜻하는
금송(金松)리는 마을 앞의 산모양이 거문고와 같다하여 금성(琴城)이라 불리었으나 이름이 어렵다하여 금송으로 바꿨다고 한다. 한때는 금송(錦松)으로도 불리었다, 금송리는 쇠 금(金) 소나무 송(松)자를 쓴다. 금송은 일본 남부 고야산이 원산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나무이다. 공주 무릉왕릉의 관재로 사용 될 만큼 고급 자재로 쓰이긴 하지만 일본이 원산이라는 이유 때문에 현충사 안에 있던 금송을 다른 곳으로 옮겨 심는 일도 있었다. 그런 금송을 마을 이름으로 바꿨다고 하니 이해가 안 되며 우리나라 고유종인 금송(錦松)으로 바꿔야 할
영지리는 선령곡(仙靈谷)의 영자와 약제인 지초(芝草)의 지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으며 한자로는 신령 령(靈) 지초 지(芝)자를 쓰며 영지버섯이 생각나는 마을 지명이다. 주민들은 사는 마을이 신선이 사는 신령스러운 땅, 영지(靈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지명이 아닐까? 선령골은 소슬령 솟을령과 같은 말로 솟다와 섰다가 같은 의미를 가진 지명으로 추정을 한다.시문(矢門)리는 시문동(矢門洞), 살문이라고 하며 한자로는 화살 시(矢) 문 문(門)자를 쓴다. 고려 말 백이정 선생이 내려와 살면서 홍살문을 세웠기 때문에 그 때부터 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