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2022년 12월에 전야산군의 중심지였던 설천면 비란리에서 시작한 남해마실 나들이가 2년 동안 남해군을 한 바퀴 돌아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승지인 선소리에서 끝을 맺었다. 역사의 기록으로 보면 외세의 침입으로 한 자리에서 터를 잡지 못하고 유랑생활을 하다가 다시 돌아와 터를 잡고 살만 하니 왜구의 대대적 침입으로 피난도 가지 못하고 숨어서 살았던 조상들의 삶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남해인 특유의 근면성과 생존력을 바탕으로 오늘에 이르렀고 후손들은 풍요로운 삶을 유지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전쟁에 참여했던 조선, 명, 일본은 제각기 다른 평가를 했고 자국중심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의 경우는 가장 발 빠르게 전승기념비를 세웠다. 그 하나가 선소리에 있는 장량상 동정 마애비이다. 그 내용은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지만 전문을 보면 ‘1598년 가을에 다시 동이(東夷)의 침략사변(侵掠事變)이 있었다. 이때 조선은 왜구(倭寇)의 환란(患亂)을 당한 지 6, 7년이 되는지라 명군(明軍)이 구원한 뒤 승전(勝戰)의 소식을 올리지 못하여 천자(天子)께서 크게 진노하였다. 중승만공(中丞萬公)에게 명하여 군사와 병참을 정비하도록 하고, 총독(總督)에는 대사마(大司馬) 형공(刑公), 도독(都督)에는 진공(陣公) 이하 문무, 장신(將臣) 10여 명이 병사들을 이끌고 앞을 다투어 압록강을 넘어 몇 갈래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원군(援軍)의 위세는 매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 같았고, 영풍(英風)은 먹이를 노리는 범과 같았으니, 장신들이 다 같이 협력하여 충성을 다하매 평양을 거쳐 경주를 지나 그 위용(威容)이 부산에서 빛났도다’라고 돼있다. 광분(狂奔)하는 왜적을 봉쇄하고 격퇴하였으니, 옛날의 전례(前例)를 본받아 제왕의 출사 명령(出師命令)에 따라 웅장한 군용(軍容)으로 국위)를 선양했다고 할 것이다. 

일본의 경우는 위키 백과에 명과 무혈철수의 쌍방 합의를 성립시킨 뒤 철수하려고 한 순천 성을 수비하던 고니시유키나가 등에 대해 약속을 어기고 공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조선의 수군이 철수하는 선단을 도와주기 위해 해상으로 출격한 시마즈 군을 중심으로 한 일본군 간에 노량에서 일어난 해전이다. 고니시유키나가 군은 이 전투가 한창일 때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거제도로 철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남해도에 남아있던 카바야마 등 약 500명의 시마즈 병력들도 순차적으로 해로를 이용하여 철수하면서 퇴각을 완료했다. 문헌에는 ‘명과 조선의 수군이 매복공격을 하였음에도 고니시를 놓쳐버리고 일본의 장군 급은 하나도 잡지 못하였고 조선의 수군은 이순신과 여러 장수들이 전사하고 명나라의 등자룡이 전사함으로써 다수의 포로를 획득하지도 못하고 쌍방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적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을 수많은 고초를 당했지만 결국은 외세의 힘을 빌려 왜군을 몰아낸 승리의 역사로 기록하고 여러 곳에 전승기념관을 만들어 기념을 하고 있다. 다음백과에서는 ‘임진년에 처음 발생하여 임진왜란이라고 하며, 7년 전쟁이라고도 한다. 1592년 4월 일본군 선봉대가 부산포로 쳐들어와 서울을 향해 북진을 하여 2개월도 못 되어 전 국토가 유린되었다. 선조와 세자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 한산도대첩 등 해전의 승리로 일본의 해상작전이 좌절되고, 전라도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으며 육지의 곳곳에서도 유학자들과 농민이 주축이 된 의병이 일어나 육상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2월 명나라가 4만 여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일본과 협정에 들어갔다.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 다시 침입했으나 육지에서는 권율·이시언의 조명 연합군에 패하고 해상에서는 이순신에게 패하여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다’고 적고 있다.

남해의 선소 왜성은 사천의 시마즈 군과 고니시유키나가 구하러 갔던 소오요시토시가 머물던 곳이었다. 관음포에서 패배한 왜군들은 가청곡을 넘어서 왜성이 있었던 선소로 도망을 간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해 보니 아무 것도 없이 성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분산을 해서 주변의 산으로 도망을 가고, 일부는 바다로 배를 빼앗아 타고 도망을 가기도 한 패잔병들이 마지막으로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다. 

순천시에서 입수한 케리 레드야드 교수의 정왜기공도 사진을 중심으로 KBS 역사스페셜에서 1999년 6월에 방송한 자료를 보면, 마지막 장에는 고니시유키나가의 사위 종의지가 주둔했던 남해 왜성을 중심으로 왜 패잔병을 수색하여 섬멸하는 모습을 그림은 보여주고 있다. 많은 왜병들을 소탕하고 있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임진정왜도를 통해서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는 노량해전이라기보다는 남해왜성 소탕작전이었다고 봐야 할 만큼 그림이 보여주는 사료로서의 가치와 의미가 크다고 생각된다. 

남해도 소탕작전으로, 순천 왜교성을 둘러싼 2달간의 전투는 끝이 나고 7년간의 임진왜란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조선과 명 연합군은 일본군이 버리고 간 배를 모두 불태우고 포구를 봉쇄했으며, 진린이 11월 21일 낮에 성을 수색했지만 텅 비었고 성 위에 불빛이 있었지만 곧 꺼졌다고 하며, 새벽녘에 적들이 밤사이에 뒷산으로 도망쳤고 일본군은 수만 석이 되는 곡식, 총포, 화약, 소, 말 등의 가축을 놓고 갔다고 한다. 

진린은 수급을 얻기 급급하여 방옥을 불태우게 해 3천여 석의 양곡이 소실되었으며, 유정도 24일에 도착해 일본군이 남긴 수급을 찾는 것에 몰두하다가 조선 사람 중에 일본군에게 잡혔다가 산 속으로 들어가 숨어있던 사람들을 찾아내 모조리 목을 베면서 고니시가 보낸 적의 인질 6명의 목도 베었다. 또한 진린이 남해도에서 불을 질러 일본군뿐만 아니라 남해에 사는 조선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손문욱이 이 상황을 보고해 진린이 중지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죄 없는 남해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가 있다.

인간사냥의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갈 곳을 찾지 못해 구천을 헤매는 혼령들에 대한 위령비라도 세워 혼령들을 위로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흔적 없는 들판에서 분향하며 맑은 술 한잔을 올리오니 부디 흠향하시어 후손들의 불효를 용서하시고 이 땅이 평화와 번영의 터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마을마다 숨겨진 비경이 있고 아름다운 전설과 아픈 역사가 남아있지만 다 전하지 못하고 마실 나들이를 마무리하는 데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을의 골목마다 아이들로 넘쳐나고, 시끌벅적했던 학교도 없어졌다. 주민들은 줄어들고 빈집은 늘어나고 있어 옛일들을 기억하는 노인들도 유명을 달리하고 전해줄 사람도 전해들을 사람도 없다. 정겨운 고향 마을에 대한 애착심도 우리 세대가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향이 타향이 되는 시대적 변화를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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