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 김만중(1637~1692) 선생은 숙종이 정비인 인현황후를 폐비시키고 장희빈을 세우려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당한다. 그가 절해고도의 남해의 유배지에서 쓴 남황과 사친시의 애달픈 사연을 떠올려 보며 시집과 고향신문에 발표한 필자의 시 한편도 말미에 적어 본다. 南荒(남쪽의 변방)西塞經年謫(서새경년적) 서쪽 변방에선 해를 지난 귀양살이南荒自首人(남황자수인) 남쪽 변방에선 허연 머리의 죄인灰心情攬鏡(회심정람경) 재가 된 마음에 거울 잡기 귀찮고血泣情乘棦(혈읍정승쟁) 피눈물 흘리며 정신없이 뗏목에 올랐네落日鄕書斷(낙일향서단)
약천 남구만 선생의 영유시 20수는 남해특산물인 유자를 선비에 비유하며 그 아름다움을 찬양한 한 것 외에도 유자로 인한 농민들이 과도한 조세부담에 힘들어 하고 있음을 고도의 상징성과 은유의 기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20수를 모두 소개함은 그 양이 너무 방대하여 남해군지(2018년도 발간)에 올려진 20수 중 그 한 수를 올려보며 그 당시 우리 고향의 유자 향기와 선조들의 애환을 들춰 보기로 한다. 【이 지방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수 십 년 전에는 마을의 집에 유자나무가 곳곳마다 숲을 이루어 매년 가을과 겨울사이에는 유자의 누런빛이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1629~1711) 선생은 숙종 초 대사성·형조판서를 거쳐 1679년(숙종 5)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같은 해 남인인 윤휴·허견 등을 탄핵하다가 남해로 유배되었다. 남해에서 9개월여 유배생활을 하면서 그 당시 우리 고향의 특산물 유자를 노래한 영유시(詠柚詩) 20수를 비롯하여 제영등망운산(題詠登望雲山), 제영등금산(題詠登錦山) 등을 남겼다.지면관계상『남해군지』상권(2010년)에 수록된 제영등망운산 1수만 올려보며 당대의 거목이 남해의 진산 망운산에 올랐던 시대로 돌아가 오래 전에 우리 고향을 다녀갔던 그
남해에 유배문학을 뚜렷이 남긴 대표적인 인물로는 6명 정도로 압축된다.자암집에 화전별곡 등 수많은 시를 남긴 자암(自庵) 김구(金絿)를 필두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라는 불후의 명작 소설과 어머니를 위한 시를 남긴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망운산과 금산에 올라 고향을 생각하며 고향을 그리는 시를 남긴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장인 김만중을 생각하며 매부(梅賦)를 쓴 소재(疎齋) 이이명(李頤命), 남해의 풍속을 담은 기행문인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을 쓴 후송(後松) 유의양(柳義養), 15개월 정도의 짧은 유배기간 동안 300여
앞의 세종 때 경상도 지리지 곤남군조의 기록에서 ‘죽산리 일대 언막이 공사에 읍성을 헐어서 사용했다’는 역사적 현장을 필자는 봉천에서 멱 감으며 성벽 돌로 추정되는 잘 다듬은 어마어마한 큰 돌들 밑에서 미꾸라지 묶은 대꼬챙이로 손바닥 보다 큰 참게와 가재는 물론 팔뚝만한 뱀장어를 많이 꼬셔내었다. 봉천의 언막이로 하마정들과 파천들에 홍수가 밀려오는 것을 막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한다. 그 때 농사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 하여 치수에 치중할 때이고 우리 조상들은 그 때 어떻게 홍수를 막아 마을과 농토를 지켰는가를 후대는 알아야
죽산리(竹山里)라는 지명은 여러 문헌과 비문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경상도 지리지에서는 남해읍성의 이전 과정에서 그 중심지로 적혀있기도 하다. 즉, 경상도 지리지 곤남군조를 살펴보면 읍성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세종 19년 남해를 복원하여 읍을 두었고, 세종 21년(1439) 화금현산성에서 죽산리(竹山里)로 읍성을 이전 축성하였는데 기존의 읍성이 비탈진 곳에 있어 옮겼다. 세종 21년(1439)에 읍성을 설치한 곳이 바로 군청이 위치한 곳이다. 읍성의 최초 제원은 문종 원년(1451) 「청경상충청각관성자척량계」라는 보고서를 정이오
외로운 만리 땅에 두 거목이 만났으니매화가 미리 알아 감응으로 피어 난 날슬프게 초사 읊으며 매부지어 바치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봉천이라는 큰 하천에는 여름날 멱 감으며 고태기와 송사리와 가재를 잡던 추억,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이면 아버님을 따라 봉천 지류에 대발을 치고 참게와 뱀장어를 한 바구니씩 잡던 추억, 그 봉천이 끝나는 곳에 강진바다가 펼쳐져 온갖 해산물이 넘쳐나 자맥질로 소라와 피조개, 새조개를 건져 올리던 추억이 새롭다. 어린 시절의 죽산 마을과 봉천 주변의 이러한 목가적인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역사적 큰 흐름이 이
세종의 아들 밀성군의 6대손인 이이명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역모를 꾸며 남해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모함으로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1722년에 노량진에서 사사 되었다. 이이명 선생의 적소이면서 서당 역할을 했던 습감재에서 충신효제(忠信孝悌)의 가르침을 받았던 남해와 인근 지방의 유생들은 이 소식을 듣고 부모를 잃은 듯 비통해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목호룡의 고변이 거짓으로 탄로되어 목호룡 등은 참수 후 당고개에 효수되었다. 그리고 노량진에는 당시 사화로 비명에 간 소재 이이명 선생을 비롯한 김창집, 이건명, 조태재의
할머니 손을 잡고 동문 안 길을 갈 때죽산리 경계선의 성벽돌 정말 컷다언젠가 어느 논문에 큰 돌 사진 올렸다 유배객들이 읍성 주변에 호롱불처럼 내걸었던 시문들은 필자를 항상 읍성주변을 서성거리게 했다. 어릴 적 어른들이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의 안과 밖을 호칭하며 북문 쪽에 위치한 봉양대, 생원골, 향교, 포교당 등에 심부름을 시키던 일들을 회억해본다. 필자가 어릴 때 할머니께서는 닭을 키우며 모은 달걀을 시장에 내다 팔고 필자에게는 맛있는 장터 국수를 사주시며 그 외 가정에 필요한 여러 물건을 사오셨다. 그 추억의 맛을 잊지
눈물에 먹을 갈아 유배의 땅 서사할 때당대의 대제학은 역사 한 켠 비통함에봉천사 묘정비문도 울먹이며 썼으리 필자가 문학에 눈을 떠 습작기를 거쳐 한국문단에 등단하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 내 고향 마을 죽림에서 유배객들이 남긴 이야기와 작품들은 내 곁을 떠난 적이 없다. 내 고향 마을 죽림 속에서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던 그 분들의 이야기와 작품들은 이전 연구단체와 연구자의 여러 문헌을 끈질기게 탐색하여 그 본류를 거의 찾았지만 그 작품들이 탄생한 디테일한 창작지와 마을의 전설과 융합되는 스토리텔링적인 비하인드스토리를 찾는
봉천(鳳川), 파천(巴川), 망운산(望雲山)이라는 지명은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花田別曲)에 존재하고 소재 이이명이 매부(梅賦)를 지은 곳과 적소도 봉천변 주변이었으며 남해유배문학관이 세워진 곳도 바로 망운산 자락이 쪽으로 물길을 펼친 이 봉천변이다. 거기다가 서포 김만중의 적소에 있던 매화나무 두 그루를 그의 사위인 소재 이이명 선생이 옮겨와 심어서 키운 곳도 적소로 추정되는 읍성의 죽산리 당산 매원 주변의 습감재(習坎齋)임을 생각할 때 남해읍성과 봉천변 주변은 유배문학의 메카임이 틀림없다. 겸재(謙齋) 박성원(朴聖源,
읍성을 깔고 앉은 마음이 편안한가?영령이 끌어 올린 그 성벽 묻은 후손지금도 늦지 않으니 천우신조 따르라 남해에 유배문학을 남긴 여섯 분 중 서포 김만중과 자암 김구를 뺀 나머지 네 분의 적소가 모두 남해읍성 주변임을 생각할 때 국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중량감은 대단하다. 그래서 이곳을 포함한 노도 문학의 섬과 약천 남구만이 많이 들렸던 용문사와 자암 김구의 적소가 있었던 노량을 기반으로 유배문학의 테마 고을로 발전시킨다면 그 풍부한 자원은 전국 어디에서도 남해를 따라올 수가 없을 것이다. 남해유배객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서포 김만중
망운산 맑은 물이 읍성을 감고 돌때봉천에 실려 오는 매화향기 넘실대니 매부(梅賦)는 서포 소재의 한이 서린 초혼가조선 개국 이래 가장 당파 싸움이 심했던 조선 숙종 조 정변의 회오리는 한양의 한 가운데에서 일어났지만 거기에 휘말렸던 인물들은 산간벽촌 오지와 절해고도로 내쳐졌다. 그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영의정 소재(疏齋) 이이명(李頤命) 선생은 우리 고장 남해로 유배되어 왔는데 그 적소가 남해읍성 주변의 죽산리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소재 이이명 선생의 사후에 건립된 봉천사 묘정비 비문에 새겨진 내용에 봉천사 위치의 기록이 있고 구
기왓장 한 개로도 사찰 하나 들어서고성 밑돌 한 개로도 장성을 엮는 요즘 우리의 남해읍성을 도로 묻은 불상사서포 김만중과 자암 김구를 제외한 나머지 남해에서 유배문학을 남긴 유배객들은 모두 읍성이나 성 주변이 그 적소로 전해 온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남해읍성, 유배문학의 산실인 이곳을 2008년 9월 초에 읍내의 시가지에 도로를 내다가 대규모의 남해읍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론이 분분하였다. 천우신조로 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이 읍성을 대대적으로 발굴하여 문화재적 읍성의 위상을 살려 관광지로 발돋움해보자는 여
읍성의 흔적들이 손짓하고 있음에도수 백 년 읍성 밑돌 가지런히 있음에도그것을 묻어야 하는 새털 같은 무게여봉천이라는 큰 하천은 넘실대는 물결처럼 필자의 추억이 많이도 출렁거리던 곳이다. 여름 날 멱 감으며 고태기와 송사리와 가재를 잡던 일과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날이면 아버님을 따라 봉천 지류에 대발을 치고 강진바다로 향하는 참게와 뱀장어를 한 바구니씩 잡던 일을 반추해본다. 봉천이 끝나는 곳의 강진바다는 온갖 해산물과 해초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해초 사이로 자맥질해 들어가면 소라와 피조개 새조개들이 발과 손에 스친다. 빈소라 고둥
당산의 매화향기 적셔 본 분들이여그 향기 읍성 돌아 창선으로 건너갈 때 봉천과 강진 바다는 비몽사몽 흘렀네남해유배문학관 뜰에는 큰 비석이 서 있다. 높이 260cm, 폭 83cm, 두께 32.5cm로 이른바 봉천사 묘정비다. 봉천사 뜨락에 있던 봉천사 묘정비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으로 보이며 봉천사 묘정비만 읍 공용터미널 맞은 편 봉강산 자락에 있다가 남해 유배문학관으로 옮겨졌다. 그 습감재 서당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죽산마을 뒷산 당산에 매부를 짓게 된 매화 두 그루의 후손인 매화나무가 크나큰 매원(梅園)을 이루
모두들 탄성 지른 천우신조 읍성 발견 선조가 가지런히 차곡차곡 쌓은 보물 후손이 도로 묻다니 부끄러운 보물섬 이 글의 대부분 내용은 2019년 10월 3일자 《남해시대》 신문 지상에 《읍성을 묻은 후손들이 명예를 되찾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내용과 대동소이하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 되어가는 상황이 읍성의 역사성을 가볍게 보고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분위기를 직감하며 다시 한 번 올린다. 고향 양대 신문을 번갈아 가며 이렇게 읍소하는 연유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신다면 이미 백발성성하여 귀거래사 읊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나이에
읍성에 내걸었던 호롱불 깜박깜박내일을 기약 못할 숨결처럼 희미한데천고에 휘날린 시문 성벽에 걸치다소재 이이명 선생의 큰 사상과 가르침과 그 당시 부분적인 세상 판도를 적은 봉천사 묘정비가 큰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난 2011년 12월 27일자로 봉강산 자락에서 남해유배문학관 야외공원에 옮겨졌다. 봉천사묘정비의 이전을 시작으로 매부(梅賦)의 연유문(緣由文)이 아닌 매부(梅賦)가 유배문학관에 소개되었다. 유배객들이 읍성 주변에 호롱불처럼 내걸었던 시문들은 필자를 항상 읍성 주변을 서성거리게 했다. 어릴 적 어른들이 동문안, 동문밖, 서문
봉천사 묘정비에 눈길이 머무나니당대의 역사 문화 정치 사회 문학까지 마멸을 멈추어야 할 보물섬의 서사시당대의 거목들이 유배지 남해에서 혈서처럼 써 내려간 작품들을 조명해 보고 그 시대에 어떤 고초를 겪으며 어떤 정신세계를 열어갔는가에 대한 것과 그 당시 작가들이 백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아보는 것은 대단히 흥미 있는 일이다. 더구나 지금 기록해 놓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질 비하인드 스토리를 탐구하는 것은 역사가뿐만 아니라 그 역사가 존재했던 곳에 몸을 담고 구전과 전설을 수집하며 일부 노출된 성벽이나 유
복숭아도 개복숭아 약이라 불러주니어느 새 몸값 올라 천출은 사라지고 밭떼기 양지 바른 곳 상전으로 모시더라몇 년 전 수십 명의 고향 향우님들과 북한산에 올랐다가 정릉으로 하산하면서 잠깐 휴식을 취하는 동안 누군가 소리쳤다. ‘야! 개복숭아다’ 거의 경탄 수준으로 외치며 가르친 곳으로 일행들은 눈길을 돌렸는데 거기에는 개복숭아 여남은개가 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있었다. 손이 미치는 낮은 곳은 누군가 다 따가고 꼭대기에 남아있는 것은 아주 높아 그대로 붙어 있는 것 같다. 그 당시 서울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던 후배 향우에게 누군가 개복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