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松 감 충 효시인/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
시인/칼럼니스트

할머니 손을 잡고 동문 안 길을 갈 때

죽산리 경계선의 성벽돌 정말 컷다

언젠가 어느 논문에 큰 돌 사진 올렸다 

유배객들이 읍성 주변에 호롱불처럼 내걸었던 시문들은 필자를 항상 읍성주변을 서성거리게 했다. 어릴 적 어른들이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의 안과 밖을 호칭하며 북문 쪽에 위치한 봉양대, 생원골, 향교, 포교당 등에 심부름을 시키던 일들을 회억해본다. 필자가 어릴 때 할머니께서는 닭을 키우며 모은 달걀을 시장에 내다 팔고 필자에게는 맛있는 장터 국수를 사주시며 그 외 가정에 필요한 여러 물건을 사오셨다. 그 추억의 맛을 잊지 못해 장터국수를 하는 음식점을 찾을 때가 많지만 그때 읍성 시장터의 그 국수 맛은 아직껏 찾지를 못했다. 

죽산 마을에서 시장까지 오고 가는 길은 동문 안과 동문 밖의 경계선이었다. 집의 축대나 담장에 쓰인 크나큰 돌들에 대해 할머니께 여쭤보면 옛날 읍성 성벽이라고 설명해주셨다. 

2019년도로 돌아가 본다. 8월 8일 고향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남해읍성이야기(1)에서 ‘남해읍 새 도시계획, 옛 읍성이 최대 변수다.’라는 대서특필 기사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1915년과 2019년의 읍 지적도가 비교되어 나와 있었다. 이를 보며 남해읍성의 동, 서, 남, 북 4대문의 위치를 가늠해보고 내가 어릴 적 걸었던 길을 비교해 봤다. 전문가는 “군청, 남해초 부지 읍성 관련 유물 발굴 가능성 높다”고 했고 8월 15일자 남해읍성이야기(2)에서는 ‘남해읍성, 자연발생 아닌 주민편의 위해 축조돼’ 제하에 읍성의 존재를 부각시키며 선소항이 읍성 위치 선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내용과 남해읍성의 특징을 상세히 소개하였다.

8월 22일자 남해읍성이야기(3)의 ‘과거와 현 모습 비교’에서 동서남문지 중 서문지가 잘 보존돼 있음을 사진자료를 통해 보도하였다. 9월5일자 남해읍성이야기(4)의 ‘남해읍성 서문지, 읍성 내 고고학적 가치 가장 높아’에서는 2014년 서변리 서문지 일대의 상세한 성벽 모습과 함께 출토된 유물 16점을 소개하였다. 

지역신문의 역할과 소임을 다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남해읍 새 도시계획, 옛 읍성이 최대 변수다”라는 거대담론은 모든 남해군민과 남해읍민과 관계기관과 군청사추진위에서 깊이 새겨들어야 할 고향에서 달려오는 중대한 화두임이 분명했기에 거기에 대한 내용을 고향 신문에 계속 연재하여 초창기 읍성 발굴에 대한 큰 기대를 걸었던 때가 3년이 지났다.

《남해시대》에 3년 동안 150회로 대장정의 연재를 마치고 신문에서의 한정된 지면을 보충하여 시조가 있는 산문 《텅 비어서 부끄럼 없구나》의 제목으로 한 권의 책을 출간한 바 있는데 필자가 3년 전에 쓴 이 글을 부분적으로 소개함은 세상사 바쁜 가운데 남해읍성이야기가 세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거나 추진하는 쪽에서도 조금은 느슨해진 남해읍성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언급하는 것이다. 

유배문학이라는 근본 개념과 시사성의 일치는 변할 수 없어 앞으로도 《남해시대》에 이어 《남해신문》에도 언급될 것이기에 언론사와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구해야 할 부분이다. 남해유배문학은 읍성을 외면하고서는 그 뿌리가 연약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유배객들의 적소가 읍성 주변인데다 읍성의 상징성에 힘입어 눈물 젖은 유배문학을 읍성의 성벽에 호롱불처럼 내걸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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