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천면 문항리 남해 3·1운동 발상 기념탑 앞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 오늘의 정세가 그때의 암울했던 시기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귓전을 울리는 만세 소리는 가슴에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 묘한 여운, 아마 그것은 여전히 우리가 담아내지 못한 대통합에 대한 아쉬움은 아닐까요. 아니 어쩌면 105주년이라는 장구한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아있는 진리에 대한 목마름,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의 샘을 정착시키지 못한 아쉬움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독립 만세 운동을 불렀던 당시의 열정만큼이나 오늘에 있어 우리의
난음(蘭陰)리는 난현내리(蘭縣內里)로 불리던 곳으로 신라시대 전야산군의 속현이었던 난포현의 중심 마을이다. 난포, 난읍, 난부(蘭府) 등으로 불리었다. 고려 때 중국 명사가 이곳의 지형을 보고 난음의 뒷산이 난초꽃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그 산을 난화산, 난화방(蘭花坊, 나암방)이라 부르고 산 아래 마을을 난음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신라초기에는 내포(內浦)현으로 불리다가 경덕왕이 난포현으로 고쳐 남해군의 영현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 때 명사가 지었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내포현이 난포현으로 바뀐 연유
파계승놀이와 양반놀이, 서민생활을 보여주는 놀이를 더 세분하여 ① 벽사(辟邪:귀신을 물리치는 것)의 의식무와 굿, ② 파계승에 대한 풍자, ③ 양반에 대한 모욕, ④ 남녀의 대립과 갈등, ⑤ 서민생활의 실상과 애환 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이것은 당시의 특권계급과 형식적인 윤리에 대한 일종의 비판정신을 구체적으로 연출하는 민중극이며, 세계 어느 나라의 민속극에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의 약점이나 시류의 악폐, 당시에 호사를 부리던 계층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패러디(parody)인 바, 이러한 서민문학성은
설 명절, 모처럼 문중 친족이 정말 오랜만에 자리를 함께하였습니다. 만남이야 늘 상 있는 일이지만, 문중 친족이 모두 모일 수 있는 날은 명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날따라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안부와 함께 문중의 사명과 얼을 계승하자는 내용도 그렇고, 향후 조성될 문중 묘지 문제를 비롯하여 시대가 바뀜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장례문화를 두고 열띤 토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시간이 많이 흘러 모임을 끝내려는 순간, 참석한 한 분이 “아! 그래도 그때 그 시절이 참 좋았지. 이
우리 온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살아가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직업들에 종사하면서 체력이 닿는 한 최후까지, 아니 죽음 직전까지도 일을 놓지 않고 아주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분들과, 그저 빈둥빈둥 놀고먹으며 편하게 살아가는 재주 좋은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옛날에 사농공사이라고 해서 직업들을 비교적 단순하게 생각했었는데, 요즘 직업은 1만여 가지가 넘는 직종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각각 분야별로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야 하고 여러 갈래로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들을 해야 하고 정말 복잡한 사회 환경에 적응하면
석평(席坪)리는 다정리와 무림리 사이에 있는 넓은 벌말로 건너편 난음리에 있는 비자당의 동산이 배를 엎어 놓은 모양과 같고 배의 돛이 들판을 덮은 것 같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석평리는 돗 석(席) 들 평(坪)자를 쓴다. 우리말 이름은 돗들이다. 돗은 돌, 덫, 돼지를 이르는 고어이지만 배의 돛과는 다른 말이다. 훈몽자회에서는 돗 석(席)자는 돗자리를 말하는 것으로 돗틀로 짠 돗자리와 가는 끈으로 엮은 자리로 구분하였다. 드물게 배에 다는 돛을 뜻하기도 하지만 돛은 한자로 돛 범(帆)자가 따로 있고 돛단배를 범선이라고 한다.
양주별산대놀이의 예를 들어 보면, 상좌·눈끔적이·왜장녀·애사당·소무·노장·원숭이·해산모·포도부장·미얄할미역은 대사가 없고, 그 밖의 배역들은 대사와 함께 춤과 몸짓으로 연기한다. 과거의 탈춤은 남자들만이 탈을 쓰고 놀았으므로 대체로 여자 탈은 대사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대사의 특징을 보면 봉산탈춤의 경우 비교적 운문(韻文)의 억양을 고집하고 있는 데 비하여, 양주별산대놀이는 평명(平明:알기 쉽고 분명함)한 일상 회화조의 대사를 주로 하고 있다. 그 중 옴중과 취발이의 대사는 이 놀이의 백미로 관중의 흥미를 끌었고, 영남의 탈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안다, 알고 있다는 행위는 사물의 본질이나 상태를 인지하였거나 이해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식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경험을 통하여 인지하는 연륜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안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앎이라고 표기해 봅니다. 이 앎은 그냥 우연히 생겨났다기보다 반복적인 학습의 과정을 통하여 성취되기도 합니다. 또한, 앎을 이끄는 방편도 의식이 안정적인가 아니면 감정적인가에 따라서 앎이나 안다는 작용이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비록 안다는 것에 뚜렷한 기준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주재하는 당사자
다정리(茶丁里)는 괴음산에서 흘러내린 입현천과 송등산에서 흘러내린 다천천 사이에 있는 마을로 들에 작설차(雀舌茶)밭과 정자가 있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다천과 금석마을을 합하여 다정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옛 지명은 다정천리(茶亭川里)였다. 다정천리는 차 다(茶) 정자 정(亭) 내 천(川)자를 쓰는 마을로 물이 흐르는 냇가에 차나무가 많았거나 정자가 있었던 마을로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물이 귀해 모린내라 불리는 냇가에서 차를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며 지금은 차 다(茶) 고무래
“산대놀이”는 고려 시대에 발생하여 조선 시대에 발전한 가면극 놀이로 ‘산대(山臺)’란 산대 놀음을 하기 위해 마련한 임시 무대를 이른다. 한길가 또는 빈 터에 대를 높이 쌓고, 그 위에서 연극 등을 하였다. 탈을 쓰고 소매가 긴 옷을 입은 광대가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노래와 재담(才談)을 곁들인다. 양반과 파계승(破戒僧)에 대한 풍자, 남녀의 삼각관계, 서민 생활의 어려움 등이 주를 이루며, 대체로 12마당으로 구성되었다. 모닥불이나 기름불로 조명하였으며, 탈막은 탈이나 옷을 갈아입는 곳으로 전체를 백포(白布)로 둘러싸고 탈판
마을 뒤에 있는 호구산(虎丘山)에서 흘러 내려오는 영오고랑에는 폭포와 작은 못이 있다. 이 소(沼)에 용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용소리는 한자로는 용 용(龍) 늪 소(沼)를 사용하여 용이 사는 늪이 있는 마을이다. 용소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에 깊이 파인 웅덩이를 말하며 용이 사는 골짜기는 용추(龍湫)라고도 한다.호구산에 있는 용문사(龍門寺)는 하동 쌍계사의 말사로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한 금산 보광사의 후신이다. 1660년에 남해 향교와 입구가 마주본다는 이유로 백월이 호구산으로 이전하여 용문사로 하였다고 한다. 후에 탐
지난주까지 “호모 페스티푸스 영원한 삶의 축제”로 축제의 기원과 원형, 축제의 치유와 소통, 희생제의 등 다양한 주제로 칼럼을 썼다면 이번주부터는 한국의 축제에서 가장 대표적인 놀이 산대놀이를 중심으로 칼럼을 연재하고자 한다. 가면을 탈 또는 얼굴에 덧씌우는 도구란 뜻의 면구(面具)로 부르기도 하고 가면(假面)은 한자로 ‘가짜의 얼굴’이란 뜻을 가진다. 가면을 한자로 번역하면 가짜 얼굴을 만드는 도구라 할 수 있다. 진시황릉의 6,000구가 넘는 실물 크기의 병사들의 얼굴을 보면 하나도 같은 얼굴이 없다. 이렇듯 인간의 얼굴은 한
2024년 청룡의 해 갑진년(甲辰年)의 새해가 활짝 열렸다. 새해 연초에는 각자 새로운 꿈과 희망을 기원하면서 가정의 화목과 사회의 안녕을 염원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은 우리 사회 모두의 ‘집안이 화목하여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가정 내 화목과 사랑을 잘 구현하여 사회가 조화롭고 행하는 모든 일이 원만하게 잘 풀려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보통 ‘화(和)’는 벼(禾)와 입(口)을 합친 말인데 벼는 밥이 되는 곡식이고 입은 음식을 먹는 몸의 일부이므로 ‘화(和)’는 ‘밥을 먹는다’는 말이
새해가 밝았습니다. 아니 새날이 또 밝았습니다. 떠오르는 해야 어제와 다를 바 없지만, 새해 첫날은 시작의 의미와 새로움이라는 의미가 새겨져 있기에 그 기운이 또한 평소와 다른 감회를 느끼게 해 줍니다. 지난해와 새해는 단 하루 상관이긴 하지만,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의미를 두면서 심중을 달래는 이러한 다짐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관점이 다 틀리므로 새로움의 여부를 객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어느 분은 단, 한순간에 깨달아 새로움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지극한 공덕이 있어도 새로움에 도
나는 남해가 좋다. 뛰어난 풍광이나 지난날의 추억 때문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지금의 남해 사람들이다. 가능하면 일찍 남해읍 전통시장에 가 보라. 세상 어디에 그런 반가움과 정겨움으로 시장을 찾는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하는 곳이 있단 말인가. 그들이 파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성실한 일상의 숭고한 아름다움이다.홍덕정 남면 면사무소와 버스 정류소 사잇길을 오후에 걸어 보라. 꿈에나 그리는 느림의 평화가 겨울 햇살보다 길게 늘어져 있다. 무지개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내 친구 석환이가 보내 주는 마늘과 시금치는 깊은 우정과 성실이 아
설흘산(雪屹山)의 옛 이름은 소흘산(所訖山)이었다. 소흘산이 언제부터 설흘산으로 바뀌었으며 무슨 이유로 바뀌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고 알려주는 자료도 없다. 지금의 설흘산은 가천의 다랭이마을과 함께 트래킹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정상에 오르면 탁 트인 남해의 멋진 풍광은 등산객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명소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남쪽의 해안선은 소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우며 산정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은 장관이다.소흘산의 기록은 조선 세종 30년(1448) 의정부에서 병조의 첩정에 의거하여 소나무를 사사로 베지 못
일단 예술이라는 용어의 기원을 살펴보면 라틴어로 아르스(Ars)에서 유래되었으며, 현대에서 아트(Art)는 단지 물리적 기술과 관련된 용어만은 아니고 현실적 삶 속에서 경험적 지식이나 실천적 지식과 관련해서도 자주 사용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3가지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들에게 ‘무시케 (Mousike)’는 음악을 의미하는 뮤직의 어원이 되기 때문에 흔히 음악으로 번역하거나 이해한다. 그러나 그리스어의 무시케는 훨씬 넓은 영역을 포함한다. 무시케를 관장하는 무사여신들은 기억의 여신 므네
1973년 6월 22일 개통한 우리나라 최초의 현수교인 남해대교는 자연적으로 생긴 섬 남해군을 육지와 연결해 준 다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세계 최고 현수교인 금문교를 본떠서 만들었다. 길이 660m 폭 12m 동양 최대의 현수교였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올해로 50년이 되었다. 긴 세월 동안 무거운 짐을 지고 버틴 탓에 보수 공수 후 대형 타량은 새 다리를 이용하고 있다. 남해대교를 개통하는 날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와서 다리가 무너질까 봐 교통정리를 할 정도였다 한다. 인기는 물론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신혼
필자가 마을 어귀에 들어설 때면 늘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노모(老母) 한 분이 나지막한 돌담에 앉아 앞산을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어떤 때는 누군가가 그리워서, 또 어떤 때는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재미가 그만일 것 같아 앉아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분이 전부일까요. 약간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햇빛이 들기만 하면, 어김없이 돌담에 앉아 산을 응시하는 모습은 무언가 애절한 사연이 있는 듯합니다. 그 사연이란 마치 누구를 기다리는 듯한, 아니 꼭 올 것이라는 희망을 마음에 담아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정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인간은 탁월성을 발휘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며, 인간만이 웃는 동물이라 주장했다. 피타고라스는 인간의 삶을 축제라고 했으며, 축제에 참가하는 운동선수는 시합을 위해 참가하고, 많은 사람들은 구경하기 위해 참가한다. 이에 하위징아는 축제의 본질을 놀이에서 발견했으며, 놀이의 본질은 재미에 있다고 했다. 하위징아는 인류의 특징인 호모 사피엔스보다 더 확실하게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것은 호모루덴스라고 했다. 호모루덴스는 유희, 놀이하는 인간을 말한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위징아는 놀이의 본질적 요소로 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