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어려워도 포기하지 말고, 자신감을 가지면 당신은 충분히 해낼 수 있어요.”
이 한마디 말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특히 가장 신뢰할 수 있고 믿음이 돈독한 남편이나 아내 혹은 친구로부터 이 말을 듣게 되면 긍정의 기운이 무한히 솟아오르고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자신감뿐만 아니라, 온몸의 근육 세포도 활성화되어 주변 생명의 성장에도 심대하게 영향을 미치게 합니다.
한 사람이 생각을 긍정적으로 지니면 전체 생명도 이에 동화되어 긍정의 이미지로 반응한다는 논리는 선뜻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전혀 신빙성 없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창조되는 모든 형상은 생각 에너지를 통해 매개되는데 생각이 반영된 심령(心靈) 에너지는 어느 곳이든 간섭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일러 영(靈, 생각)의 활동이 시작되었다고 하며, 세상이란 영(靈)의 건전성과 윤리성에 따라 영의 적극적 표현은 형상이 있는 것이요, 영의 소극적 섭리는 형상이 없는 것이라는 경험의 뉘앙스를 담보하기도 합니다.
영(靈)의 실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건전한 양식과 긍정의 생각 이미지에 따라 진화와 창조의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인데요. 생각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생각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건전성과 윤리성을 담보한다는 뉘앙스는 정말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더군다나 칭찬과 격려가 한없이 부족하고 상대방을 경계와 배척의 대상으로 여기는 오늘의 풍조에서는 더욱 이러한 신주를 굳힐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 내 생각이 복잡하고 심란하면, 그러한 기국(器局)에 따라 생각의 영(靈)이 세계에 반응하여 그대로 드러난다는 이치에서 세상이 험하다면 내가 가진 험한 생각에 따른 반응인 것이요, 세상이 심란하면 심란한 대로, 복잡하면 복잡한 대로의 세상이 형상화되는 것도 내가 어느 위치에 있든 그릇된 생각을 하는 생각의 에너지장이 그릇되게 영향을 미치게 한다는 원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 기운과 에너지장을 펼치게 되고 긍정의 생각은 긍정의 기운과 에너지장이 주변에 펼쳐지게 됩니다.
그러한 생각에서 나타나는 부질없는 망상은 생각에 더해지는 추측과 욕심으로 사념(思念)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사념은 구름과 같습니다. 부질없는 생각과 생각이 도화선이 된 사념은 갖가지 물질의 형상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비유하면 망상으로 동물의 형상을 상상하면 동물의 형상이 현실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도깨비나 귀신, 요괴 인간과 같은 괴생명체의 출현도 우연이 아니라, 허상이나 망상이 반영된 상상 속의 생명체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허상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기적 생각을 지니면 이기적 동물로, 욕심이 가득한 생각을 지니면 욕심 많은 동물 형상이 되며, 맹수같이 사나운 생각을 지니면 사나운 동물이 된다는 이야기가 결코 허언이 아닌 것입니다.
생각 하나가 이렇듯 무서운 이미지로 세상을 장식하기도 하는데 만약에 어느 한 사람이 극한의 원한이 발동되어 배달되는 우유에다 독을 타서 집마다 돌릴 생각을 공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 누구든 독을 먹으면 죽을 것이라는 위협에 우유를 배달받는 지역이 극도의 공포에 젖게 될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 앞에서 부정을 생각하면, 그 나무는 부정의 기운에 싸여 사시나무 떨듯 긴장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인가 하는 것은 물리적 실험이 동반되어야 하겠지만, 생각이 지닌 위력을 생각하면 정말 사려 깊고 의미 있는 에너지장이 될 수 있도록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생각이 건전하면 온 생명의 기상도 건강해진다는 논리에서 우리가 생각을 어떻게 지녀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생각의 건전성은 내 안에 살아있는 생각의 근원 자리. 생각이 일어난 최초의 시작점을 자각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한 현상도 생각하면 있는 것이요, 생각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습니다.
형상이 있고 없음은 우연히 나타난 것이라기보다 반드시 어떤 조짐이 있어 생각이 가미되고 활동이 시작됨으로써 그 결실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이 드러난다는 것, 세상에 처음 생각이 드러난다는 것, 생각의 입자가 최초로 발현된다는 의미, 이것이 이 시대 생각의 모티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 최초 생각의 건전성을 위해 명상을 하며 나와 다른 생각을 배척하고 불신할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살펴보고 그의 생각에도 나름의 바름이 있을 수 있으니, 내 생각처럼 여기고 인정하며 긍정해보는 여유로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각기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지혜, 이것이 생각의 묘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에 동화된 기운이 심화기화(心和氣和)의 장으로 펼쳐져 갈등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의무라면 행여나 지금 내 생각으로 인해 세상이 갈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당연히 누군가가 밉거나 원망스럽거나 꼴도 보기 싫다거나 하는 것도 생각이 만든 허상이라면 이를 무시하여 갈등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 아니라, 화해의 생각으로 용서와 포용심을 지니는 것이 생각의 또 한 도리이기에 이 여름이 가기 전에 그러한 생각을 가시화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또한 전체 생명을 유익하게 하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