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몸을 일으켜 맨발로 행자승을 따랐다. 소란에 놀란 사람들이 우르르 그를 따랐다. 산문(山門)을 나설 때부터 천경의 뇌리에는 백운의 얼굴이 계속 맴돌았다. 골짜기에 피 칠갑을 한 채 쓰러져 있는 승려는 백운일 거라는 망념이 머리를 들쑤셨다.‘아, 이 무서운 예감이 부디 빗나가기를……’마른 가시에 찔린 발바닥에서 피가 솟구쳤다. 피는 눈을 적시고 흙을 물들이고 자갈을 덮었다.몽둥이에 얻어맞고 칼에 찔리고 발길질에 걷어차인 한 사내가 바위 틈새에 구겨진 채 쓰러져 있었다. 눈발마저 이 흉물을 비껴 내렸다. 찢겨진 입 사이로 검붉은
봄날 강물에 도리꽃도 따뜻한데지팡이에 기대 앉아 늦은 잠을 즐기네.꿈에서 깨자 기이한 일 있으니스님께서 무릉의 기약에 맞춰 오셨구나.오신 곳에는 폭포가 몇 겹이었는가지난 밤 쓴 시가 떠오르는구나.삼소의 모임을 이루고 싶으니 비낀 햇살에 펄럭이는 깃발을 대하노라.-옥호공이 공무로 정선으로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호계에서 만나자 약속해 이렇게 말했다.春水桃花暖 搘筇坐睡遲 夢回奇事在 僧赴武陵期來處幾重瀑 相思前夜詩 欲成三笑會 斜日待旌麾玉壺公以公赴旌善 歸路約會於虎溪 故云-
그렇게 몇 년 동안 백운은 천경을 찾아오지 않았다. 도반에게 서찰을 보내 안부를 물었지만, 도반도 행처를 알지 못했다.‘자네마저 손에서 칼을 빼앗지 못했다면 누가 그를 만류할지 억장이 무너지네.’도반은 자신의 무기력을 탓하며 서한의 끝을 마무리했다.아주 백운의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가끔 사찰을 찾아오는 객승(客僧)들 편에 소식이 들려있을 때도 있었다.백운은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곳곳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호남 땅에서 걸승(乞僧)으로 살아간다 했고, 평양에 나타나 관찰사의 송별연에서 잔칫상을 뒤집어엎었다는 난데없
무표정하게 낭송을 마친 백운이 묵송(默誦)을 몇 차례 더하고 씩 입가에 미소를 담았다.“스승께서 저를 보내시면서 천경 앞에서는 가식을 버리라셨는데, 과연 허언이 아니었네예.”천경은 왠지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자네의 객기가 자네를 다치게 할까 저어대네. 낭중지추(囊中之錐)는 주머니 안에 있을 때야 서슬이 퍼런 것이야. 주머니를 나온 송곳이 방향을 돌리면 자칫 자네를 찌를 수도 있어.”백운이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틀린 말씀은 아니지예. 참으로 고마운 말씸임니더. 스승께서는 소승을 보내시면서 이런 말씀도 하더이다. 내 법우(法友
어느 날 공양주 할멈이 오더니 쑥덕거렸다.“큰스님. 얼마 전에 온 스님 행실이 도를 넘어섰습니다. 따끔하게 혼을 내지 않으면 경을 칠 거예요.”중을 바라보는 세간의 눈이 곱지 않은 시절이었다. 임란(壬亂)을 치른 뒤 여우비처럼 잠깐 호의를 보이던 사대부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인심을 돌려세웠다. 산행 때 타고 갈 가마를 대령해라 종이를 몇 축 장만해 바쳐라 성화가 자심한 것이야 으레 그러려니 했다. 절간에 와서 주지육림에 빠져 난동을 부리는 것도 시절인연이려니 여겼다. 헌데 꼬투리만 잡으면 절간을 폐사(廢寺)하려는 수작은 막무가내로
다음날 새벽 예불을 마치자 세상이 희뿌옇게 밝아왔다.간밤을 지난 여즉 내리는 진눈깨비가 골짜기와 마당을 덮어 세상은 온통 먹통 속에서도 흰빛을 드리웠다. 승방으로 돌아오니 노인장이 따끈한 죽을 끓여 소반 위에 올려놓았다. 빈한한 절간 살림을 속일 수는 없는지 건건이라고는 김치 한 종지가 전부였다.“대접이 시원찮아 송구하네예. 한계울이라 내놓을 게 궁합니더. 날이 새면 요 아래 대계마을에 내려가 곡식 좀 주선해 오것십니더.”어제 화방사 오는 길을 물었던 동네 이름이 대계인 모양이었다. 곧 주저앉을 것 같은 초가집 몇 채가 마지못해 땅
머리를 들어 고즈넉이 그를 내려다보는 부처와 눈빛을 마주했다. 부처의 입술 끝에는 의미를 알 길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깟 추위도 이기지 못한 깜냥에 무슨 해탈이냐는 질책이 엿보여 무안해졌다.문득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4)의 소불(燒佛) 공안이 떠올랐다.어느 날 단하가 혹심한 추위를 뒤집어쓴 채 혜림사(慧林寺)에 닿았다. 당장 얼어 죽을 것 같은데, 승방은 온통 냉골이었다. 뭐 불쏘시개로 쓸 게 없나 뒤적이다 불전(佛殿)에서 목불(木佛)을 발견했다.냉큼 마당으로 지고 내려와 도끼로 뽀개 장작을 만들었다. 몇 백 년 잘
남녘 땅 남해에 있는 화방사(花芳寺)는 비바람에 씻겨 남루한 천년 고찰이었다. 영남의 끝자락하고도 가장 서쪽, 호남의 동쪽 기슭과 코를 맞대고 있는 아득한 오지, 남해라는 섬에 둥지를 튼 가람이었다.산사라면 으레 삼면이나 사면이 봉우리로 둘러싸인 우묵한 사발 모양의 땅에 터를 잡기 마련인데, 화방사는 비탈을 굴러 내리다 그루터기에 걸려 잠시 몸을 쉬는 돌무더기거나 가풀막을 따라 흐르다 고이고, 흐르다 고인 연못처럼 층층을 이루며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누구보다 헌사로웠던 소성거사(小性居士)의 족적이 이 절해의 고도까지도 닿았던 모양인
너는 좌선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불타를 흉내내고 있느냐? 좌선이면 선은 좌와(坐臥)에 얽매이지 않으며, 앉아 있는 불타는 선정의 자세에 얽매이지 않는다. 진리는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일부러 취사(取捨)해서는 안 된다. 너는 앉아 있는 불타를 배워서 불타를 죽이고 있다. 좌선에 사로잡히는 것은 선에 도달하는 길이 아니다.-남악회양(南岳懷讓, 677-744)사찰로 올라가는 산길에는 진눈깨비가 들끓었다. 게다가 바람까지 만만찮게 부니 눈 부스러기가 매몰차게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아무리 남녘땅이라지만 여기도 조선의 한 모서리
생각지도 못한 큰 수확이었다. 그 친구란 분이 호은선사에 대해 뭘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리 소상하게 캐묻고 다녔다면 수확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도 남해 출신이었으니 연고지의 인연이 많이 작용했겠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선사에 대한 관심은 호기심 이상일 것이 분명했다.“그 친구 분, 어디 가면 만나 뵐 수 있을까요?”우리들 입에서 합창하듯 같은 질문이 나왔다.“여길 떠난 지 꽤 됐지 아마.”“돌아가셨나요?”침이 꼴깍 넘어갔다.“글쎄, 죽었단 소식은 못 들었으니 숨만 잘 쉬고 있으면 목숨은 부지하고 있겠지요.”
나는 효준 형님과 봉윤이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봉윤이 얼굴을 손으로 한번 쓸어내리더니 말했다.“행님 말씀은 그냥 그렇다는 것이고예. 좋은 일에 마가 낄 수 있다는 염려지예. 다만 그 치들을 저도 좀 아는데, 원칙보다는 이익을 앞세우는 놈들이라 입맛을 다실 게 뻔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더.”나로서는 딱히 집히는 데가 없는 말이었다. 남해에 분탕질을 치는 위인들이 있는 것은 나도 아는 사실이었고, 누군지도 대강 짐작이 갔다. 사업이라고 벌여놓고 몇 푼 예산 빼먹는 짓거리를 한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호은선사가
박 회장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그것이 선조의 은덕을 갚는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에게 실현이 무망한 일이라고 설득하는 것은 어딘가 무책임해 보였다. 한번 마음의 불이 붙으면 앞뒤 안 가리고 밀어붙이는 효준 형님의 열정도 일을 미루지 못하게 했다.“고작 백 년 전 그림 아이가. 천 년 만 년 전 그림도 멀쩡하게 전해지는 시상인디, 설마 그림이 없어졌을라고. 게다가 호은선사는 우리 남해가 낳은 큰 스님 아이가. 그런 분의 그림을 찾아낸다카몬 올매나 보람찬 일이고. 남해로 봐서도 경사제.”칼을 뽑아 진군을 외치는
남해와 관련된 작품이 지어진 때도 같은 해였다. 연보에 따르면 이 해 가을 곽종석은 문인들과 함께 남해를 유람했다고 했다. 곽종석은 노량으로 들어와 화방사를 들러 하루 잤고, 용문사에 와 호은선사를 만난 뒤 곡포에서 술 한 잔을 마시고 금산에 올랐다.금산에서 곽종석은 모두 17편의 작품을 썼는데, 이를 묶어 ‘금산십칠영(錦山十七詠)’이라 불렀다. 그리고 금산 정상에 올라 쓴 작품으로 기행시는 끝났다. 모두 23편의 한시를 곽종석은 이때 지은 셈이었다.나는 남해신문에 이 사실과 작품들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실었다. 지면 때문에 충분한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2012년 제3회 김만중문학상 대상을 받고 남해로 내려와 창작과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현재 고현면 중앙동에 살면서 화전매구보존회와 고현집들이굿놀음보존회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발표한 작품에 , ,, 죽는 자는 누구인가?> 등이 있다. 남해 상주작가로 활동 중인 임종욱 작가가 남해 금산 보리암과 용문사, 남해읍 먹자 골목 등 남해를 배경으로 남해 사람들의 삶을 그린 단편소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