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그림을 찾아서(1)
잃어버린 그림을 찾아서(1)
  • 남해신문
  • 승인 2020.08.2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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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욱 작가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2012년 제3회 김만중문학상 대상을 받고
  남해로 내려와 창작과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 현재 고현면 중앙동에 살면서 화전매구보존회와 
  고현집들이굿놀음보존회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발표한 작품에 <소정묘 파일>,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
<남해 : 바다가 준 선물>, 죽는 자는 누구인가?> 등이  있다.

 

남해 상주작가로 활동 중인 임종욱 작가가 남해 금산 보리암과 용문사, 남해읍 먹자 골목 등 남해를 배경으로 남해 사람들의 삶을 그린 단편소설을 써 본지에 약 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임종욱 작가가 보고 느끼는 남해가 어떤 모습일지 함께 돌아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 편집자 주 - 

용문사는 예상보다 조용했다. 보름 넘게 퍼붓던 장마가 걷힌 뒤여서 참배객이 많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일주문 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는데 인적이 드물어 오히려 어색했다. 장마 덕분에 불어난 수량으로 콸콸 흐르는 계곡 물소리만 우리를 반겼다. 이따금 들리는 산새 소리가 화음을 더했다.
“우찌 된 일이고? 코로나로 남해 사람들이 다 죽었나?”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효준 형님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날이 몹시 무더웠다. 장마 뒤끝은 무더위라지만, 오늘따라 산사 계곡에는 바람 한 점 없었다. 조용한 것을 ‘쥐 죽은 듯하다’고 하지만, 사람마저 죽은 것 같았다.
“다들 피서 갔지 누가 여길 온다고예. 아이구, 이 더위 참 시원해 쥑이네.”
봉윤이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술에 취했을 때를 빼곤 늘 진지한 봉윤은 활기에 차 있었다. 한 발 성큼 앞서가더니 천왕각이 있을 만한 방향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 너머 봉서루(鳳棲樓)가 있을 참이었다. 지난 번 교통사고 이후 날이 궂으면 오금을 제대로 펴지 못하던 봉윤이었다. 그러니 여름의 땡볕이 반가울 만도 했다.
“아니, 남해에 이만한 피서지가 오데 있다고? 확진자 딱 한 명 빼끼 안 나온 청정 남핼 두고 어떤 시산이가 역병 소굴을 찾아간기고? 안 그요? 팀장 양반.”
효준 형님이 셔츠 단추를 풀어 속으로 바람을 집어넣으면서 조금 뒤쳐져 우리를 따라오는 팀장을 돌아보았다.
정진혜 팀장은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여름 초입부터 본래 사무는 접어둔 채 우리 셋을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를 맡은 정진혜 팀장은 유독 더위에 사족을 못 썼다. 게다가 남해를 벗어나 여러 지역을 탐문할 때 운전도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거의 혼자 운전을 했다. 지칠 만도 했다.
정진혜 팀장은 단발머리를 따라 목덜미로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연신 닦으면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손짓했다.
“천천히 좀 가세요. 그 분이 어디 가시겠어요.”
봉윤이의 발걸음을 따라잡느라 서두르다 보니 그녀가 뒤처지는 것도 몰랐다.
“어허, 젊은 아가씨가 그리 기운이 없어 쓰것소. 다 음양의 조화가 부족해 그런 거 아닌감.”
효준 형님이 아직 미혼인 정진혜 팀장의 처지를 비꼬면서 혀를 끌끌 찼다. 이 말에 팀장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말씀 잘 못 하시면 큰 코 다치세요.”
“괜찮소. 내 코는 작으니께 다칠 일도 없을 거구먼.”
여전히 효준 형님은 정 팀장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그때 몇 걸음을 앞서가던 봉윤이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장마에 떠내리갔나 걱정 태백이로 하시더니, 행적비는 잘 계시네요.”
행적비란 천왕각으로 오르는 길 중턱 바위 위에 세워진 ‘본사중흥주선교양종호은당대선사행적비’를 일컫는 것이었다. 이 여름 우리를 전국 곳곳을 찾아다니는 순례객으로 만든 시발점이었다.
울창한 수풀을 배경으로 삼은 채 바위를 기단 삼아 버티고 있는 행적비는 아래서 보니 세월의 무게를 얹은 해탈한 장승처럼 보였다.
행적비를 보면서 나는 잠시 지난 추억에 잠겼다.
벌써 3년 전의 일이었다. 남해에서 매주 발행되는 신문사에서 내게, 남해의 중요한 금석문을 소개하고 전문을 번역하는 연재를 제안해 왔다.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내려온 뒤 나는 짬만 나면 남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숨겨진 글감이 없는지 살폈다. 그 결과 남해에 의외로 금석문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으레 있기 마련인, 남해를 다녀간 현령(縣令)들의 선정비(善政碑)나 불망비(不忘碑)는 젖혀두더라도 수백 기의 다양한 금석문들이 흩어져 있었다.
잡초 우거진 길가나 골목 틈새에 숨어 있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고 소박을 당한 채 세월을 이겨가는 비석들을 보면서 나는 남해의 참된 역사가 돌덩이 속에 갈무리된 채 살아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저 비석들이 마모되어 사라지기 전에 거둬 챙기는 일이 필요하다고 절감했다. 그런 소회를 지역신문사 기자에게 지나가는 말로 던졌는데, 기자는 내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작가님께서 중요한 것부터 소개해주셔야죠.”
그 많은 금석문을 언제 다 소개하냐고 걱정했더니 기자가 눈웃음을 치면서 재촉했다. 지방 소규모 신문사의 빠듯한 형편에 취재비나 원고료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내 입에서 나와 성사된 일이니만큼 다른 핑계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매주 하나씩 금석문을 골라 연재를 시작했다. 그러다 이 호은선사의 행적비도 소개하게 되었다. 행적비는 사찰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지금 장소로 옮겨놓았다. 그런데 이건(移建)할 때 바위를 파 비신(碑身)을 집어넣은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아래 부분 비문이 있는 곳까지 묻어 버렸다. 그래서 행마다 한두 글자씩 확인할 수 없는 곤란이 생겼다. 예전 탁본도 없다고 해서, 결국 몇 자씩 빠진 글을 어설프게 번역할 수밖에 없었다.
연재는 1년 여 정도 이어지다 사정이 있어 마무리했다. 금석문 전체를 소개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다른 청탁이 들어오자 기억에서 조금씩 지워졌다.
호은선사가 내 기억 밖으로 다시 호출된 것은 지난겨울이었다.
늘 따뜻한 기후를 보이던 남해에 유난히 추운 날씨가 거듭되었다. 그래서 쉽게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집에 갇혀 책만 뒤적거렸다. 그때 후배 김봉윤에게서 전화가 왔다.
“행님, 전에 호은선사 비석을 소개한 적 있지예. 용문사에 있는……”
“그런데?”
“조선 말 때 호은선사를 직접 만난 사람의 시가 있더라고요. 혹시 아십니까?”
나는 의자에 깊이 묻어 두었던 몸을 일으켰다. 호은선사는 1850년 8월 24일에 태어나 1918년 1월 3일, 세수 69세, 법랍 54세로 입적했다. 이미 조선 말기 때부터 화승(畵僧)과 율사(律師)로 명성이 높았으니 교분을 나눈 문인이 없으리란 법은 없었다.
“그래? 누군데?”
“독립운동가 면우 곽종석(郭鍾錫, 1846-1919) 선생의 문집이라예. 행님이 한번 찾아보이소.”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에 접속했다. ‘문집총간’ 항목에 들어가 ‘虎隱’을 검색하니, 과연『면우집』권8에 <용문사(龍門寺)>란 제목의 작품이 있었다. 7언절구였고, 작품과 함께 시인이 붙인 간략한 주석이 붙어 있었다.
원문은 이랬다.

龍門正對海雲遙 용문정대해운요
曲澨蜒蜿騈首朝 곡서연완병수조
山僧不識治平術 산승불식치평술
枉要君王一眄饒 왕요군왕일면요
有僧虎隱者 畫錦山形勝 將以上獻故及之 
유승호은자 화금산형승 장이상헌고급지

내용을 읽어본 나는 묘한 전율을 숨길 수 없었다. 이 시를 우리말로 옮기면 이랬다.
용문사는 아득히 바다 구름을 마주했는데
만(灣)을 두른 해안이 구불구불 막 돋는 해를 맞이하네.
산에 사는 스님이라 세상 다스리는 법은 모른다 해도
군왕께서 한번 살펴볼 것을 바라노라.
절에 ‘호은’이란 스님이 있는데, 금산의 경치를 그려 장차 임금에게 바치려 하기에 이렇게 말했다.

용문사는 앵강만이 한 눈에 보이는 호구산 중턱 계곡에 위치해 있다. 앵강만이 시작되는 입구 어름에 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유배와 살면서 한글소설『구운몽』과『사씨남정기』를 썼다는 노도가 얹어놓은 삿갓처럼 방점을 찍고 있다. 곽종석은 그 용문사의 경관을 첫 구와 둘째 구에서 묘사했다. 그리고 한 승려에 대해 ‘세상 다스리는 법’은 모른다 해도 난세의 어두운 길을 밝힐 만한 인물이니 관심을 가져달라고 군왕에게 요구했다. 아침 해를 보았다니 용문사에서 하룻밤 기숙했을 것으로 보였다.
주석은 더욱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승려의 이름은 ‘호은’이고, 더구나 그가 금산을 그려 임금에게 바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 왜 금산을 그려 그것을 임금에게 헌정하려고 했는가? 나는 『면우집』을 더 뒤져 보았다.
뜻밖에『면우집』권8에는 남해와 관련된 시가 상당수 실려 있었다. 권8에 실린 시들은 곽종석이 신축년부터 쓴 작품들이었다. 해제에 딸린 곽종석의 연보를 열었다. 신축년은 간지로 1901년이었다. 조선 말기 나라가 망해가던 시기의 작품들이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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