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그림을 찾아서(2)
잃어버린 그림을 찾아서(2)
  • 남해신문
  • 승인 2020.09.0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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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욱 작가
임 종 욱 작가
임 종 욱 작가

남해와 관련된 작품이 지어진 때도 같은 해였다. 연보에 따르면 이 해 가을 곽종석은 문인들과 함께 남해를 유람했다고 했다. 곽종석은 노량으로 들어와 화방사를 들러 하루 잤고, 용문사에 와 호은선사를 만난 뒤 곡포에서 술 한 잔을 마시고 금산에 올랐다.
금산에서 곽종석은 모두 17편의 작품을 썼는데, 이를 묶어 ‘금산십칠영(錦山十七詠)’이라 불렀다. 그리고 금산 정상에 올라 쓴 작품으로 기행시는 끝났다. 모두 23편의 한시를 곽종석은 이때 지은 셈이었다.

나는 남해신문에 이 사실과 작품들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실었다. 지면 때문에 충분한 설명은 담지 못했지만, 핵심은 호은선사와 그가 그렸다는 금산 그림에 놓여 있었다.
고종 황제에게 진상하기 위해 그렸다는 금산 전경. 과연 어떤 장면을 담았을지 나는 몹시 궁금해졌다. 호은선사가 굳이 금산을 택한 까닭이 산 이름의 유래가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서 나왔다는 설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추측은 쉽게 나왔다. 또 금산에는 태조 이성계가 찾아와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신불(神佛)에게 빌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그를 기념하는 전각이 있기도 했다.
어쩌면 호은선사는 이성계의 기도로 새로운 왕조 개창이 이루어졌듯이 자신의 그림을 통해 망국의 길로 접어든 조선의 국세가 다시 회복되기를 바랐을 지도 몰랐다.

호은선사는 생전에 화승으로서 많은 사찰에서 그려진 다양한 탱화의 증명법사로 초빙되었다. 부처의 신이함과 영험함을 기리는 그림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었음을 인증하는 구실을 하는 이가 증명법사였다. 그런 중요한 역할을 아무에게나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법력이 높고 수행의 깊이가 단단하면서 화가로서의 역량까지 갖춘 이라야만 가능했으리라.
이런 추측과 함께 나는 그가 그린 금산 그림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기원으로 글을 맺었다.

남해가 낳은 고승대덕의 그림 이야기를 다뤘으니, 나는 은근히 남해에서 작으나마 반응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글 잘 읽었다는 인사만 전했을 뿐 기대했던 반향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해프닝으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바람은 의외의 방향에서 불어왔다.
역시 발단은 김봉윤의 전화에서 시작되었다.
“행님, 누가 좀 만나자고 하시는데예.”
“왜?”
만나자는 말에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던 나는 사람보다는 이유부터 물었다.
“행님이 쓴 호은선사의 후손 분께서 상의할 일이 있으시다쿠네예.”
놀랍게도 남해에는 호은선사의 후손이 살고 있었다. 15살에 출가한 스님이 후손을 남겼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기에 더욱 뜻밖이었다.
“아니, 스님에게 무슨 후손이 있어?”
“직계는 아니고 종증조부가 되신답니다. 그러니까네 형제분의 후손이지예.”
선조의 숨겨졌던 이야기를 알려줬으니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나 보다 생각했다. 그리 부담스런 자리를 아닐 듯했다.
“그러지. 언제?”
“오늘 저녁에 만났시모 좋겠다쿠네예. 제가 고현으로 가겠십니더.”
“그렇게 급한가?”
“행님이 쓴 글을 좀 늦게 읽었나 보데예. 기왕이모 하루라도 빨리 만났으면 하십니더.”
지루했던 겨울이 작별 인사를 하고 새 봄이 올 무렵이었다. 후손의 인사도 듣고 기분전환 삼아 봉윤이와 술 한 잔 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알았어. 그때 보자.”
봉윤은 바로 전화를 끊지 않고 말을 보탰다.
“한 분 더 참석할 깁니다.”
“후손이 두 분인가?”
“아뇨. 효준 행님입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형님이었다. 효준 형님과는 남해에서 전승되는 풍물패 ‘매구’에서 함께 연습하고 공연을 다니는 사이였다. 성격도 밝고 나이 터울을 갖고 유난을 떨지 않아 편안했다. 둘만 마시는 썰렁한 술자리보다는 셋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 당연히 더 좋았다.
“알겠는데, 후손 분에게 결례가 되지 않을까? 불청객이 끼었다고.”
봉윤이 가볍게 웃는 소리가 수화기로 전해졌다.
“후손 분이 효준 행님과 아는 사이랍니다. 오늘 만남도 효준 행님이 주선하셨던가 보던데예.”
그렇다면 거리낄 일은 없었다.
나는 봉윤이 차를 몰고 집에 올 때까지 차를 마시면서 책을 마저 읽어나갔다.
호은선사의 후손이라는 분은 읍내에 있는 한정식 집에서 만났다. 표정이 편안했고, 머리가 백발이라 효준 형님보다 몇 살은 더 위로 보였다. 풍채가 당당한데다 옷매무새도 단정해 수도승의 후손다운 풍격이 전해졌다.
“어서 오니라. 저녁이 되이 날씨가 쌀쌀해지네. 춘래불사춘이여.”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효준 형님이 먼저 우리들을 맞았다. 일어나려는 후손 분을 만류하면서 나와 봉윤은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내가 두루 아니 소개를 맡지. 여기 이 친구는 박 회장이라고, 내하고 둘도 없는 불알친구여. 중핵교만 마치고 외지로 나가 살았는데, 사업에 성공해서 돈이라면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지. 그렇다고 악덕 기업주를 떠올리면 안 돼여. 직원을 가족처럼 아끼는 사람인께.”
효준 형님의 추임새가 한없이 길어질 것 같자 후손이라는 분이 말을 끊었다.
“이 사람아, 그만 허시게. 더 말했다가는 자네 거짓말 다 탄로나겠어.”
마침맞게 식사가 들어왔다. 박 회장이란 분이 특별히 주문했는지 여느 날의 한정식과는 차림이 달랐다. 차비를 마치고 직원이 나가자 박 회장이 따로 옆에 둔 술을 꺼냈다. 술을 한 잔씩 돌리고 난 뒤 상기된 표정으로 박 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제가 몰랐던 집안 어른의 일화를 발굴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 간 사업 때문에 해외 출장을 다녀와 좋은 글을 뒤늦게 읽었습니다. 제가 비록 타지에 살지만 고향 소식이 그리워 남해신문을 구독하고 있었지요. 문(文)자 성(性)자 할아버님의 사연을 읽자니 너무나 감회가 벅차 여기 효준이에게 연락하고 바로 내려왔습니다.
할아버님은 어떻게 보면 저의 집안 은인이기도 합니다. 예전 우리 집안 살림이 구차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용문사에 계시면서 할아버님이 많이 돌봐 주셨지요. 그 어른의 자비야 우리 집안에만 미친 게 아니니 아직도 많은 고향 분들이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차린 것은 부족하지만 더 좋은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고 즐겁게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말에 조리가 있었고, 품격도 높았다. 저음의 목소리가 이따금 떨렸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취기가 조금 올랐다. 나와 봉윤이는 호은선사와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들과 「면우집」에 실린 곽종석의 시를 찾기까지 숨은 사연들을 감회에 젖어 전해주었다. 그러다 성미 급한 효준 형님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박 회장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화제를 돌렸다.
“박 회장. 술맛도 기가 막히게 좋긴 한데, 이러다 본론 놓치겠어. 자네 뜻을 전해보게.”
그제야 박 회장이 가볍게 숨을 내쉬더니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그러지. 이렇게 좋은 글까지 써 주셨는데, 또 한 가지 어려운 청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할아버님의 선행은 다 들으셨고, 제 선친께서 돌아가시면서 이런 유지를 남기셨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데는 문자 성자 할아버님의 은덕이 태산 같으니, 나중이라도 큰 은혜를 갚으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기회가 닿는 대로 용문사에 시주도 하고 불사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희사를 했지요. 할아버님의 은덕의 일부라도 갚는 방법은 그것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신문을 읽으면서 할아버님께 직접 보은할 길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박 회장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효준 형님은 다 안다는 듯이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고, 우리들은 무슨 부탁인지 몰라 박 회장의 입만 빤히 쳐다보았다.
박 회장이 갑자기 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깊숙이 숙이면서 단도직입 용건을 꺼냈다.
“문자 성자 할아버님이 그리셨다는 그 그림, 금산 그림. 그 그림을 여러분들께서 꼭 찾아 주십시오. 비용이 얼마가 들든 혹시 누군가 소장하고 있다면 금액이 얼마가 되든 제가 구입하겠습니다. 그 그림을 들고 선친 묘소에 찾아가 유지를 받들어 할아버님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았다고 보고를 하게 해 주십시오. 이 늙은 사람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봉윤이와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동시대 시인의 작품에 나오는 한 줄 글귀를 가지고 어디에 가서 그림을 찾는단 말인가! 설령 찾았다 한들 그 그림이 호은선사가 그린 진품임을 어떻게 입증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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