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종  욱작가
임 종 욱작가

박 회장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그것이 선조의 은덕을 갚는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에게 실현이 무망한 일이라고 설득하는 것은 어딘가 무책임해 보였다. 한번 마음의 불이 붙으면 앞뒤 안 가리고 밀어붙이는 효준 형님의 열정도 일을 미루지 못하게 했다.
“고작 백 년 전 그림 아이가. 천 년 만 년 전 그림도 멀쩡하게 전해지는 시상인디, 설마 그림이 없어졌을라고. 게다가 호은선사는 우리 남해가 낳은 큰 스님 아이가. 그런 분의 그림을 찾아낸다카몬 올매나 보람찬 일이고. 남해로 봐서도 경사제.”
칼을 뽑아 진군을 외치는 효준 형님 앞에서 봉윤과 나는 약졸(弱卒)이 될 수 없었다. 아니 그런 핑계가 아니더라도 이 일은 뭔가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행님. 까짓거 한번 나서보지예. 그림이 발견된다면 가장 오래된 금산 그림이 아입니꺼. 박 회장님은 이런 일에 돈 아낄 분이 아입니더. 뒤지다보면 금산 그림만 나오겠십니꺼? 선사의 다른 작품까지 찾아낼지도 모르지예. 남해에 호은선사 미술관 하나 세우게 될지도 모르지 않십니꺼?”
워낙 스케일이 큰 봉윤이는 생각이 벌써 구만 리 앞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너무 김칫국 마시지 마. 그 그림을 찾아낼 가능성은 아주 낮아. 시를 잘 읽어보라고. 곽종석은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말한 게 아냐. 그리는 중이든가 그릴 준비를 하고 있는 정황으로 보이거든. 여기저기 들쑤셨는데 아무 것도 못 건졌을 때를 생각해봐. 우리들이 헛물 켠 거야 그렇다 쳐도 박 회장 실망이 얼마나 크겠냐.”
코로나19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중이었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호은선사의 행적을 추적하는 데 장애가 될 게 분명했다. 내 의견에 봉윤이도 조금은 신중해졌다.
“틀린 말씀은 아니네예. 하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막막하지만서도…….”
“먼저 호은선사의 행적부터 차근차근 조사해봐야 돼. 입적한 지 백 년밖에 안 된 분이니 관련 기록이 어딘가 남아 있을 거야. 당시 불교계의 거목이었으니 금석문 자료도 더 있을 것 같고. 답사는 뒤로 미루고 당시 문헌부터 찾아보자고.”
이렇게 봉윤과 나는 의견 일치를 보았다.
문헌 조사는 내가 맡아야 할 몫이었다.
찾아보니 호은선사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남해의 몇몇 사람들이 조사한 결과물이 나와 있었다. 번역에는 문제가 많았지만, 생애를 재구해 놓았고, 관련 자료를 그런 대로 수합해 놓았다.
호은선사는 남해 사람이기는 했지만 출생지가 남해는 아니었다. 조부 되는 박계복(朴啓福) 옹이 관직을 지내 지금의 하동군 금남면에서 태어났다. 10살 되던 해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할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할머니 해주 오씨마저 12살 때 세상을 떠났다. 의지할 곳이 없어진 선사는 조상의 세거지였던 남해 용소로 돌아와 얹혀살면서 힘겨운 세월을 보냈다.
당시 용소마을은 호구산 용문사 소유의 전답을 빌려 농사를 짓던 소작인들이 많았다. 남달리 총명했던 선사는 낮에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밤이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다 몇 년 뒤 1865년 16살 때 경허능언(景虛能彦)의 권유로 출가해 금우필기(錦雨弼基)를 은사로 수계(受戒)해 승려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여러 스승을 거치면서 학문과 수양은 깊어졌고, 법계(法階)도 날로 높아졌다. 금우필기의 의발을 이어받아 전등례(傳燈禮)를 마치고 30살 되던 1879년 쌍계사에서 거행된 만일회(萬日會)에 초청을 받아 법문을 강의하면서 본격적인 선사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호은선사의 행적에서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스님이 탱화가 완성되었을 때 여러 차례 증명법사로 활동한 점이었다. 증명법사는 어떤 의식이 원만하게 끝난 것을 확인해주는 승려였다. 법당에 봉안되거나 행사 때 걸리는 탱화는 관념적인 구성이 다분했지만, 불교로서는 대단히 장엄하고 엄숙한 절차였다.
스님은 평생 많은 사찰에서 주석(駐錫)했다. 용문사와 화방사는 당연하고, 동래 범어사를 비롯해 순천 송광사, 곡성 태안사, 통영 안정사, 사천 다솔사, 하동 쌍계사, 합천 해인사, 경남 고성 옥천사, 산청 대원사, 함양 벽송사, 금강산 유점사, 간성 건봉사, 안변 석왕사, 서울의 원흥사, 진주 청곡사와 호국사, 구례 화엄사 등이 그곳이었다. 스님의 그림이 지금까지도 전해진다면 이런 사찰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 사찰들을 찾아간다고 해도 과연 그곳 스님들이 소장 자료를 선뜻 보여줄지 의문이었다. 설령 보여줘 뭔가를 찾는다 해도 그림을 그린 이가 스님인 것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을까? 여느 화가들과 달리 불화(佛畵)에는 그린 이의 서명이나 낙관이 보통 들어가지 않았다. 그림 뒷면에 그림과 관련된 사실들이 첨기되어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금산을 그렸으니 그림만 봐도 스님의 작품인 줄은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일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에 가까운, 참으로 우연에 우연이 겹쳐야 나올 결과였다.
나는 지도를 펼쳐놓고 호은선사가 머물렀던 사찰의 위치를 찾아 압정으로 표시했다.
북한에 있는 사찰을 제외하니 대부분의 사찰이 경상도 지역에 모여 있었다. 서울과 간성을 다녀오는 것이 가장 먼 일정이었다. 전라도에 있는 사찰도 남해에서는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코로나19라는 또 하나의 난관을 헤치고 목적을 달성할 궁리를 하느라 머리는 점점 복잡해졌다. 세 사람의 힘으로 곳곳에 쳐진 가시울타리를 제대로 헤쳐 나갈지 걱정부터 밀려왔다.
그때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나가보니 효준 형님과 봉윤이었다. 모두 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어 복면강도 두 사람이 난입한 꼴이었다. 어정쩡하게 인사를 하는데, 표정이 꽤나 심각했다. 그림을 찾을 기대 때문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야, 이거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꼬여 간다 아이가. 때 아닌 보물찾기가 되어 버릴 판일세.”
뜨거운 커피를 쉬지도 않고 훌쩍 마시더니 효준 형님이 운을 뗐다.
“보물찾기긴 하죠. 찾아낸다면야 말입니다.”
내가 웃으며 심드렁하게 대응하자 봉윤이 의자를 당기면서 말했다.
“행님, 이번 주 신문 보시지 않았나 보네예.”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남해신문을 읽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자료를 찾느라 경상대 도서관을 들락거려 읽을 틈이 없었다. 내가 구독하는 신문은 포장지도 뜯기지 않은 채 서재 구석에서 잠자고 있었다.
봉윤이 접은 신문을 꺼내더니 내게 보여주었다.
“박 회장님께서 군수를 찾아 가셨던가 봐요. 호은선사 그림 얘기를 꺼내고는, 일은 우리들에게 맡겼지만 아무래도 관청의 도움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할아버님이 남해에만 계셨던 분은 아니니 각 지역 관공서의 협조가 절실하다, 뭐 이런 말씀을 드렸던가 봅니다.”
관공서의 협조는 나도 염두에 두었던 일이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사찰 소장 문헌이나 자료의 봉함을 여는 데 지역 관공서의 도움은 훌륭한 열쇠 구실을 할 터였다.
“군수가 나서준다면 잘 된 일 아닌가?”
봉윤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조용히 도와준다면 그렇겠죠. 군수가 박 회장님 말을 듣더니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다네예. 우리들이 그림을 찾는 데 옆에서 협조할 군청 직원까지 한 사람 붙여주겠다고 했다 아입니꺼. 만약 찾게 되면 구입을 하든 기증을 받든 확보해 군청 로비에 상시 전시하겠다 캤답니더.”
나는 점점 더 의아해졌다. 그림은 고사하고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장래 계획까지 세우는 일이 섣불러 보였다. 하지만 백짓장도 맞들면 가벼운 법 아닌가? 한 사람이라도 더 관심을 가지고 흔적을 따라간다면 시간과 경비 양면에서 이득일 터였다.
“박 회장님께서 모든 경비를 부담하겠다 하신 게 와전된 모양이군. 여하튼 입수할 수만 있다면 전시하고도 남을 가치가 있기는 하지. 하지만 소문만 무성하고 성과가 없으면 비난까지는 아니더라도 엉뚱한 오해를 받을 각오는 해야 할 텐데.”
우리 둘의 대화를 멀뚱히 듣고만 있던 효준 형님이 벌컥 언성을 높이면서 몸을 반이나 일으켰다.
“그깟 오해나 비난이 두려워서 할 일 못한다면 애당초 때리차 뿌리야제. 신문에 난 건 그런 훈훈한 미담만이 아니여. 기자가 군수 말을 어떻게 전해 들었는지 그림을 찾아내는 사람에게 박 회장이나 군청에서 후사(厚謝)하겠다고 말했다는 식으로 써 놨어야. 이기 좀 걱정인기라.”
찾는 데 드는 비용이라면 얼마든지 내놓겠다고 장담한 박 회장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호은선사의 그림은 값을 따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그림을 찾는 일보다 그에 따른 보상에 군침을 흘리면 곤란했다.
“그만큼 절실하고 간곡한 일이라고 알리려는 의도라케도 굳이 쓰지 않아도 될 말을 넣긴 했십니다.”
봉윤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신문에 기사가 나온 게 나흘 전인데, 벌써 군청이나 용문사로 문의하는 전화가 여러 통 왔다카네예. 두 군데 모두 사실무근이라고 선을 그었다는데,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냐고 수군대는 사람이 있나 봅니다.”
효준 형님이 탁자를 두 손으로 누르며 말을 밀고 들어왔다.
“더 안 좋은 소식은 내가 들었어여. 우리 남해가 일점선도(一點仙島) 신선의 고장이라지만, 사는 사람들이 다 신선이믄 얼매나 좋겠어여. 이곳에도 꼭 나대는 잡놈 몇 명이 있짢은가. 그 놈들 동태가 심상찮다 하더라말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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