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한 신문사에서 퀴즈를 냈다. ‘런던에서 맨체스터로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두둑한 상금 욕심에 많은 사람이 응모에 나섰다. 물리학자, 수학자, 설계사, 회사원, 학생들이 저마다 기발한 해답을 제시했다.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한 답안은 이러했다. ‘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 이었다. 사람의 인생길은 맨체스터로 가는 길보다 훨씬 멀고 험하다. 비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는 날들이 숱할 것이다. 그 길을 무사히, 행복하게 가자면 가족, 친구, 동료와 같은 여행의 동반자가 있어야 한다.‘라피끄(Rafik)’는
며칠 전, 경상대 병원에 다녀왔다.장애자 택시는 시간을 정하는 예약제가 아니고 복지복, 필요한 시간에 맞게 부를 수는 없다. 병원에는 한시 반 예약인데 기사양반 점심시간에 걸리니 아침 8시에 전화를 해도 차례가 네 번째라고 한다. 그런데 어디 어디를 둘러 언제 올지 모르니 느긋이 기다리란다.느리게 먹는 환자의 아침을 먹이고 있는데 이동에서 출발하니 대기하란다. 아침은 굶기고 부랴사랴 준비해서 병원에 갔다.10시 반. 담당 교수님은 예약 상관 말고 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었다. 내 사정을 아는 서울 안강 원장님의 후배라고, 부탁이 먹
집에 오니 토ㆍ일요일을 제외한 날, 하루 네 시간 간병인이 배정 되었다. 그나마 숨을 쉴 수가 있었지만, 환자의 식사 준비는 필자의 몫이니 칼로리에 맞도록 식사를 조절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위류관을 달고 왔으니 소독 또한 신경을 써야 했는데 어쩌다가 그만 위류관의 통로가 막혀 음식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놀라서 경상대병원으로 연락을 하니 응급실로 오라고 했다. 119를 불러 응급실로 갔지만 더 위급한 환자를 먼저 보는 제도 때문에 고령의 내 환자는 자꾸만 뒤로 미뤄지고 계속 기다려야만 했다.여름철이라 덥기는 더웠고 내 환자
환자에게 있어서 먹는 일은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환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의 일상생활에서도 의식주가 중요한 것처럼…. 특히 1급 중환자인 필자의 환자는 두 손 두 발을 꼼짝도 못 하는 사지마비를 가진 환자라 스스로 숟가락질도 하지 못하지만 의식은 형형하여 오감을 다 느끼고 있으니 맛에도 예민하다.그런데 인공호흡기를 달고 위류관으로 유동식 음식을 줄을 통해 위장으로 바로 들어가게 만들었을 때 얼마나 슬펐겠는가? 날마다 짜증을 내고 날마다 얼굴이 바로 펴져 있을 날이 없었다. 매 끼니 뉴케어라는 위류관 전용음료를
병원에 입원하면 온갖 곳에 ‘낙상 주의’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심지어 샤워장에는 수도꼭지 하나마다 ‘낙상 주의’ 그림과 함께 팻말이 붙어 있다.그만큼 낙상은 환자에게 치명적이다. 필자도 병원에서 내 환자를 돌보다가 오로지 나의 실수로 세 번의 낙상사고가 났었다.한번은 걷는 연습을 하다가 선 채로 뒤로 넘어져서 꼬리뼈가 멍들었었다. 마루바닥에 뒤로 넘어졌는데 ‘쿵’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뛰어나올 정도였다. 요행 머리는 다치지 않았으나 꼬리뼈가 불편해서 재활을 한참이나 멈출 정도.두 번째는 매일 새
이렇듯 경상대학병원에서의 24일은 죽음의 여행길이었다. 짧다면 짧은 스무나흘 동안 온갖 느낌이 내 가슴을 회오리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내 말 한마디면 그의 목숨이 이미 저 세상으로 가버릴 뻔했던 아슬아슬한 경험. “동의서에 사인하세요” 그 사인은 죽음의 길일 수 있고 그를 살릴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사인일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는 게 더 고통이실 텐데 결단을 내리셔야 해요”객관적으로 우리를 보았다면 누구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사실 나조차도 예전에 ‘내 엄마의 인공호흡기를 떼라고 너무 안쓰러워 도저히 못 보겠다’고
지금도 잊히지 않는 2020년 11월 29일. 그날 국립경상대병원에서 너무나도 다급한 마음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나의 SNS에 올렸다.부디 기도를 부탁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사랑하는 벗님들께 간곡한 부탁 말씀을 드립니다.급하게 벗님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제 환자가 심각한 고통속에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 휠체어에 앉아 기침을 하다가 앞으로 넘어져 얼굴을 다친 이후로 계속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요. 금요일 오후부터 열이 오르고 혈압이 높아져서 산소까지 달았는데 토요일 중환자실로 옮기라는군요
필자는 13년 전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꼭 따야 할 이유보다는 그저 천주교 노인시설에 봉사활동으로 노인들 말벗이나 해드리고 안마나 조금 해드리려 했더니 요양보호사 자격을 가져야 가능하다고 해서였다. 당시는 자식이 못하는 효도를 국가가 대신해준다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생긴 지 얼마 안 된 때였다.노인장기요양보험이란 거동이 불편한 65세 이상 노인 또는 65세 미만의 노인성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혼자서 수행하기 어려울 때, 신체활동 또는 가사활동 지원 등 장기요양급여를 제공하여 노후 건강검진 및 생활 안정을 도모하고 그
다시 설날이다.세상이 많이 각박해졌다고 하나 밤은 불야성이고 해는 매일매일 찬란하게 뜬다. 내 이웃은 좀 더 따뜻 해 졌고 우리는 많이 아프다. 설과 추석 무렵이면 거의 ‘민족대이동’이 화두가 되었었다.‘전통문화를 보존’한다는 측면과 ‘만남’을 갖는 절대적인 시간이 된다는 측면에서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런 일들마저도 코로나19로 인한 거리 두기 원칙에서 벗어나니 설날 풍속도 마저도 바뀌어도 너무 많이 바뀌었다.설상가상 아픈 사람이 있는 집안의 명절은 참 슬프다. 가족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고, 일 년에 두 번 있는 명절에나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진리이다.하지만 이 말은 환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나 아프고 섭섭한 말일 것이다. 아프고 싶어 아픈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더구나 멘탈(정신)이 멀쩡한 내 환자의 경우는 더욱더 그러하다.그래서 나는 수술 후 만 삼 년을 다섯 곳의 병원을 따라다니며 1대 1간병을 했다. 양평국립교통재활병원과 경상대학병원은 공식적으로 1대1 보호자 간병을 할 수 있었지만 일반요양병원은 윈칙적으로는 보호자가 환자와 함께 지내며 간병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다행히도 십여 년 전 요양보호사 자격을 딴 상태라 코로나 사태 전
환자의 수도 많지 않고 치료약도 예방약도 아직은 없는, 그렇다고 오롯이 희귀병으로 분류되지도 않아 암처럼 의료비 혜택도 없는 이상한 병, ‘경추부후종 인대골화증’. 확실하게 낫지도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진행을 막는다는 말을 믿고 수술을 했던 사람으로서 이 병에 대해 이번 기회에 말해보고자 한다.우선 이 병은 일본과 한국 두 나라의 남성에게 주로 나타나는 병이다. 예외가 있어서 더러 여성 환자가 있기도 하다. 이 병의 수술 치료가 일본, 한국 두 나라에 제일 많이 발달되었다고는 하나 이미 증상이 진행되고 있다면 그 상태에서 진행은 막
필자는 4년째 남편의 간병일기를 쓰고 있다.여기 신문 지면을 빌어 굳이 개인적인 간병일기를 올리게 된 이유는 이렇다. 노령화 시대에 이 남해군에도 많은 환자들이 집에서 두세 시간 일해 주는 요양보호사의 보호를 받으며 병을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줄로 안다. 그렇게 병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거나 아니면 병과 벗 삼으며 살아가고 있는 환자 혹은 환자를 둔 가족들과 내가 겪고 느낀 점을 함께 나누고 싶어 서툰 필력으로나마 용기를 내어 간병일기를 공개해 보기로 한다.필자의 남편의 병은 ‘경추부 후종 인대골화증(OPLL)’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