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태 무창선면 온리원 펜션 / 시인ㆍ수필가
하 태 무
창선면 온리원 펜션
시인ㆍ수필가

환자의 수도 많지 않고 치료약도 예방약도 아직은 없는, 그렇다고 오롯이 희귀병으로 분류되지도 않아 암처럼 의료비 혜택도 없는 이상한 병, ‘경추부후종 인대골화증’. 확실하게 낫지도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진행을 막는다는 말을 믿고 수술을 했던 사람으로서 이 병에 대해 이번 기회에 말해보고자 한다.

우선 이 병은 일본과 한국 두 나라의 남성에게 주로 나타나는 병이다. 예외가 있어서 더러 여성 환자가 있기도 하다. 이 병의 수술 치료가 일본, 한국 두 나라에 제일 많이 발달되었다고는 하나 이미 증상이 진행되고 있다면 그 상태에서 진행은 막을 수 있으나 완전히 그 이전의 정상인이 되도록 하는 치료는 아니라고 수술 전에 병원 측에서 미리 말해준다.

수술 전날, 최악의 경우 죽을 수도 있는 데도 이를 알고 수술에 동의하게 해서 벌벌 떨면서 서류에 서명을 했던 기억은 지금도 가슴 서늘하다. 그리고 그리 위험한 수술이지만 단 일주일간만 입원이 가능했고 다른 병원을 찾아 퇴원을 시키라고 한다.

남편이 통증이 너무 심해 하루라도 지연하고 싶다고 부탁했더니 다른 급한 환자를 수술하지 못하게 막는 비인간적인 사람으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2018년 9월 7일 현대아산병원에서 수술하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삼천포 현대요양병원으로 전원을 왔다.

나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질환인 후종인대골화증, 이 병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 척추는 한 덩어리로 되어 있지 않고 분절과 관절이 디스크로 서로 연결돼 있는데 이를 더 잘 연결되도록 잡아주기 위해 경추부터 요추까지 길다란 인대가 전·후방으로 위치하고있다고 한다. 이 중 경추부 및 흉추부의 후종인대(후방인대)가 병적으로 뼈처럼 딱딱하게 굳어 두꺼워지면서 뇌와 연결된 척수신경을 압박하며 이상증세를 일으킨다.

후종인대는 경추뼈를 후면에서 지지하고 유연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골화가 되면 유연성이 떨어지고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개 미세한 손의 움직임(젓가락질, 단추 끼우기 등)과 배변 이상 또는 휘청거리며 걷는 보행 장애를 보이게 되고, 신경근을 압박하게 되면 경추통이나 두 팔의 통증 및 저림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수술하기 얼마 전 사진가인 내 환자이자 내 남편은 조금씩 불편한 몸으로 소매물도에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다리저림 현상으로 통영으로 나오는 마지막 배를 놓쳐 119 구조선을 타고 나오기도 했었다.

아쉽게도 후종인대골화증의 악화를 지연시키게 하거나 통증을 사라지게 하는 약은 아직 없다.

약을 개발하는 제약회사 또한 돈을 벌 확률이 높을 때 연구비를 아끼지 않고 투자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인도주의나 박애사상 같은 건 아예 없다. 다만 경제원칙이 존재할 뿐이다. 고로 이 병을 가진 환자만 억울한 것이다. 

그러니 특히 활동이 활발한 중ㆍ장년의 남자들은 더욱 더 주의를 요한다,

특히 바다를 끼고 사는 이곳 남해분들은 항상 조심 또 조심하며 안전사고에 유의해야 할 것 같다.

내 환자가 처음 옥종의 유황온천탕에서 넘어져서 점점 팔다리를 못 쓴 것처럼 일상 속의 충격에 유의하고 외상, 교통사고, 격투기, 암벽타기 등의 과굴곡 운동은 피해야 한다.

이 병은 병의 인자는 갖고 있지만 조심한다면 평생 모르고 지날 수도 있다.

이 병이 유전인지는 아직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내 아들도 이 병을 갖고 있는데 충격을 피하고 본인이 조심한다면 평생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미국병원의 의사가 말했다 한다. 아들은 아직 아무 증상 없이 잘 생활하고 있어 다행이다.

그러나 병의 진행이 시작되면 수술해도 성공률이 그리 높지 않고 재활도 어렵고 신경이 손상되어 사지를 점점 못 쓰게 되니 환자로서는 어마어마한 고통이 따른다.

사람마다 증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배변 등의 이상으로 간병 하는 가족들이나 요양사들도 애쓰기는 마찬가지이다. 수술을 한 날로부터 만 3년 하고도 3개월. 재활에도 골든타임이 있다는 말을 경기도 양평 국립교통재활원에 입원했을 때 처음 들었다. 그때는 이미 수술 후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던 때라 골든타임이라는 6개월을 이미 세 번도 더 넘긴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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