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머무는 곳 (7)
구름이 머무는 곳 (7)
  • 남해신문
  • 승인 2021.04.09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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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년 동안 백운은 천경을 찾아오지 않았다. 도반에게 서찰을 보내 안부를 물었지만, 도반도 행처를 알지 못했다.

자네마저 손에서 칼을 빼앗지 못했다면 누가 그를 만류할지 억장이 무너지네.’

도반은 자신의 무기력을 탓하며 서한의 끝을 마무리했다.

아주 백운의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가끔 사찰을 찾아오는 객승(客僧)들 편에 소식이 들려있을 때도 있었다.

백운은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곳곳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호남 땅에서 걸승(乞僧)으로 살아간다 했고, 평양에 나타나 관찰사의 송별연에서 잔칫상을 뒤집어엎었다는 난데없는 소식도 들렸다. 소식은 없이 그가 지었다는 시 한 조각이 떠돌다 천경의 손에 이르기도 했다. 천경의 눈에 백운은 천 길 벼랑을 사이에 두고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한동안 행적이 모호했던 백운의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은 임신년(壬申年, 1752) 강원도 삼척에 있는 작은 암자에 머물렀을 때였다. 계절은 새 봄을 지나가고 있었지만, 바다에서 부는 바람은 아직도 서늘했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선정(禪靜)에 잠겨 있는데, 사미승(沙彌僧)이 문을 열더니 손님이 찾아왔다고 전해주었다. 이 후미진 산골에 나를 알 이 없는데, 누굴까 의아해하면서 법당을 나와 섬돌을 밟았다.

천경을 방문한 사람은 아주 젊은 선비였다. 행색이 말끔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에는 윤기와 총명함이 범상치 않은 내공을 보여주었다. 합장을 하자 따라 손을 모으는 모습이 적의를 품고 온 사람 같지는 않았다. 바람이 만만치 않아 우선 승방으로 이끌었다.

어인 일로 이런 누거(陋居)를 찾으셨는지요?”

찻잔으로 흐르는 온기를 어루만지던 사내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면서 대답했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 수행을 방해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라는 사람으로, 작년부터 귀양 와 살고있는 처집니다. 법력 높은 스님이 인근에 계시다 해서 결례를 무릅쓰고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사대부들과 교유가 많지도 않았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유배 온 사연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젊은 나이에 유배를 왔다면 관직에 있을 만한 사람일 것이었다. 겉으로 풍기는 기풍도 어딘가 학식을 담은 그릇으로 보였다. 선담(禪談)이라도 나누자는 의사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십니까? 고초가 많으시겠습니다. 고적한 절간에서 무지렁이로 사는 사람이 무슨 도움이 될지 저어됩니다.”

천경이 너무 격식을 차리며 공대하자 선비가 표정을 풀면서 자리를 들썩거렸다.

그리 경계하지 마시지요. 스님의 법명은 제법 유림(儒林)에도 알려져 있습니다. 더욱이 시작(詩作)은 더러 시 읊는 사람의 객담(客談)에도 오르내리지요. 봄 풍광도 무르익는 시절을 만나 지척에 시승(詩僧)이 계시는데,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게 수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고금의 시를 두고 한담을 나누게 되었다. 채제공이라 자신을 소개한 선비는 시사(詩史)와 시법(詩法)을 두루 꿰고 있었다. 둘은 산사의 정취를 둘러싸고 몇 수의 시를 구호(口號)하며 주고받았다. 이순(耳順, 60)에 접어든 노승과 이립(而立, 30)을 넘긴 청유(靑儒)는 승속(僧俗)의 차이를 떨어낸 채 시의 향연을 만끽했다.

창화(唱和)가 몇 차례 돌아가자 선비가 이마를 숙이며 존례(尊禮)의 뜻을 숨기지 않았다.

역시 명불허전입니다. 홍진에 찌들었던 가슴이 세찬 소낙비를 맞아 말끔히 씻긴 기분입니다. 저의 행운이 바닥나기 전에 이쯤에서 수창(酬唱)은 접어야 할 듯합니다.”

천경에게도 오랜 만에 맛보는 시연(詩宴)이었다.

어느 새 해는 중천을 지나 서산(西山)의 마중을 받고 있었다.

운자(韻字)를 쫓다보니 대접이 소홀했습니다. 젊은 분의 시력(詩力)이 호락호락하지 않군요. 늙은 중을 방외우(方外友)로 마다 않으시니, 마음이 참으로 벅차오릅니다.”

공양은 굳이 거절하기에 사미승을 불러 간소한 다과상을 들이게 했다.

잠시 무료한 시간이 흘렀다.

선비가 생각났다는 듯 지난 기억을 들추었다.

, 작년 유배를 오자마자 시승(詩僧)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와 또래로 보이는 젊은 스님이었는데, 뜻밖에도 시안(詩眼)이 아주 밝더군요. 법명을 백운이라 했지요.”

차를 음미하던 천경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처럼 궁벽한 산골에서 백운의 이름을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백운이라 하셨습니까?”

별 뜻 없이 내뱉은 말인데, 천경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자 그도 긴장했다.

아는 스님입니까? , 아주 대단한 강골이었습니다. 생각도 대담했지만 발언도 거침이 없더군요. 제가 아주 혼 구멍이 났었습니다. 허허!”

그때 일이 선한 듯 선비가 선웃음을 날렸다.

반응으로 볼 때 선비는 백운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 듯했다. 시답잖아 보이는 선비라면 원수를 대하듯 적개심을 드러내는 백운이었다. 선비의 언행으로 볼 때 백운을 낮춰 보거나 멸시하진 않았을 듯했지만, 선량한 반응이 그를 도발했었을 법도 했다.

백운의 언동이 도를 넘어설 때도 있습니다만 악의를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혹시 무례했다면 너그럽게 해량하시기 바랍니다.”

선비는 크게 괘의치 않는다는 듯 대꾸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끌고 나갔다.

언사는 위태로웠지만 시는 참 좋더군요. 입만 거칠고 시가 형편없었다면 저도 가만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백운을 잘 아시는 듯하니 시평(詩評)은 거두고 제가 그와 합석하면서 쓴 시가 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천경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선비가 나직한 목소리를 시를 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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