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표정하게 낭송을 마친 백운이 묵송(默誦)을 몇 차례 더하고 씩 입가에 미소를 담았다.

“스승께서 저를 보내시면서 천경 앞에서는 가식을 버리라셨는데, 과연 허언이 아니었네예.”

천경은 왠지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자네의 객기가 자네를 다치게 할까 저어대네. 낭중지추(囊中之錐)는 주머니 안에 있을 때야 서슬이 퍼런 것이야. 주머니를 나온 송곳이 방향을 돌리면 자칫 자네를 찌를 수도 있어.”
백운이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씀은 아니지예. 참으로 고마운 말씸임니더. 스승께서는 소승을 보내시면서 이런 말씀도 하더이다. 내 법우(法友) 천경은 이름 그대로 하늘처럼 맑아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될 만한 사람이라꼬예. 하늘 거울을 보면서 칼날만 벼리지 말고 그 푸른 물결에 몸을 싣는 지혜를 배워보라 했심더. 또 시를 잘 보니 소승 시에 서린 살기(殺氣)를 따뜻한 화기(和氣)로 바꾸라 했지예. 살인검(殺人劍)은 되레 자신을 죽이니 활인검(活人劍)으로 남을 죽이라고도 말씸하셨심니더.”

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맥을 제대로 짚었구나. 자신을 잡을 칼을 뽑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 진정 남을 살리려는 자비심을 가질 때 남을 감복시켜 회광반조(廻光返照)하게 만드는 길이 아닐까 싶구나.”
백운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뜨끄미지근하게 처신해서야 어느 세월에 이 무간지옥(無間地獄) 같은 시상을 바로잡겠심니꺼. 지 부모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사신 분들이셨심니더. 그런데 두 분께 돌아온 것은 허망한 죽음 뿐이셨지예. 농사지을 한 뼘 땅이라도 가져싯시몬 폭풍 치는 바다에 뛰어들진 않으셨을 테지예. 잘난 사대부 집에는 고기가 썩어나고 알곡으로 개밥을 만들어주는데, 담 너머 사는 민초들은 개밥도 못 먹어 배를 곯다 죽심니더.
어디 민초들만 그렇심니꺼. 절간은 또 어떻심니꺼? 엽전 구멍만한 알량한 지식과 재주를 가지고 세상의 지혜를 모두 갈파했다고 떠드는 게 사대부들이 아임니꺼? 공맹의 처세술이란 게 부처가 설한 장광설(長廣舌)에 견줘 발바닥의 때만도 못하지 않심니꺼? 그런데도 하찮은 권력에 빌붙어 절간에 기생을 데려와 술을 퍼마시고 대웅전 안에서 온갖 음란한 짓을 마다 않심니더. 언제까정 이런 말세를 지켜봐야 한단 말임니꺼!”

한번 말문이 터지자 백운 자신도 수습을 하지 못했다. 백운이 사대부들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뇌까린다면 목숨이 열 개라도 온전하지 못할 터였다.

“말이 너무 지나치구나.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라면 말해 뭘 할까? 철없는 어린애가 막된 짓을 한다면 잘 다독여 말귀를 알아듣게 해야지. 다짜고짜 몽둥이를 들어 드잡이를 한다면 그게 올바른 중생제도의 길이라고 생각하느냐? 모기를 보고 장팔사모(丈八蛇矛)를 뽑아드는 장비 같구나.”

나름대로 다독인다고 던진 말인데, 백운은 조금도 물러날 뜻이 없었다.

“이 말세를 사는 방법이야 다양하것지예. 시님코롬 차근차근 설득해 활연개오(豁然開悟)허게 맹그는 방팬도 있겠지만서도, 부지하세월입니더. 임란 때를 생각해 보시지예.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이 번듯한 중놈들에게 칼과 창을 잡아 왜적을 죽이라 했심니더. 시님들이 파계를 무릅쓰고 전쟁터로 간 것이 한 줌 사대부들의 권력을 지탱해주기 위해서였심니꺼? 비명에 죽어가는 중생들을 도탄에서 건지고자 몸을 던진 게 아니었심니꺼? 그렇게 피를 뿌려 나라를 구해놓으니 어땠심니꺼? 차별이 사라지기는커녕 저희들 궁전이며 기와집을 짓는다고 수탈만 커지지 않했심니꺼? 그 세월이 150년도 더 지났심니더. 언지까정 수모와 멸시를 견뎌야 저들이 활연대오해서 중놈을 사람 대접하것심니꺼? 가만 앉아 있어서는 절대 그런 시상은 오지 않심니더. 지는 그런 싸사이 되지 않을랍니더.”

백운의 눈가로 핏발이 뻗었다. 그의 송곳은 주머니만 삐져나온 게 아니었다. 이미 장검이 되어 팔에 쥐어져 있었다. 어떻게 저 무모한 혈기를 다시 칼집 속으로 돌려보낼지 요량이 서질 않았다.

“그래, 자네의 대안은 무엇인가? 반란이라도 일으켜 저들의 목에 칼이라도 꽂아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한다면 자네가 원하는 화엄원융(華嚴圓融)한 세상이 올 듯한가?”

잠시 침묵하던 백운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어갔다.

“지는 활인검을 쓸람니더.”

“활인검? 자네는 이미 살인검을 뽑아들었어.”

“지 칼은 쇠붙이를 벼려 만든 칼이 아니지예. 지 칼은 말을 벼려 만든 칼임니더.”

“말을 벼려 만든 칼?”

“야. 부처가 이 몸에게 말을 벼리는 재주를 주싯시니 지는 그 재주로 저들의 목을 따버릴람니더.”

둘 사이에 사달이 난 뒤 다음 날 백운은 훌쩍 절간을 떠나버렸다. 냉기만 감도는 그의 방을 들여다본 천경은 한숨에 앞서 눈물부터 흘러나왔다.

‘이 천애고아를 어찌 할 것인고.’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