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머무는 곳 (8)
구름이 머무는 곳 (8)
  • 남해신문
  • 승인 2021.04.1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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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강물에 도리꽃도 따뜻한데
지팡이에 기대 앉아 늦은 잠을 즐기네.
꿈에서 깨자 기이한 일 있으니
스님께서 무릉의 기약에 맞춰 오셨구나.
오신 곳에는 폭포가 몇 겹이었는가
지난 밤 쓴 시가 떠오르는구나.
삼소의 모임을 이루고 싶으니 
비낀 햇살에 펄럭이는 깃발을 대하노라.
-옥호공이 공무로 정선으로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호계에서 만나자 약속해 이렇게 말했다.

春水桃花暖 搘筇坐睡遲 夢回奇事在 僧赴武陵期
來處幾重瀑 相思前夜詩 欲成三笑會 斜日待旌麾
玉壺公以公赴旌善 歸路約會於虎溪 故云
-<무릉에서 잠시 잠을 자는데, 백운 스님이 불현 듯 와 기뻐 시를 지어 드리다(武陵小睡 白雲上人忽至 喜賦以贈)>

“이 시는 얼마 전에 다시 만났을 때 쓴 것입니다. 승려의 발길은 운수(雲水)와 같다지만, 백운처럼 자취가 무상(無常)한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그에게 다시 보자는 약속은 며칠 상관이 아니었어요. 몇 달도 되고 몇 년도 되고 다음 생도 될 듯하더군요. 허허!”

백운은 여전히 만행(卍行)을 일삼고 있었다.

“행색은 어땠습니까? 지금도 삼척에 있습니까?”

미처 백운의 안부를 묻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아직 삼척에 있다면 달려가 덜미를 잡고서라도 절간으로 끌고 가고 싶었다.
“그리 누추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워낙 시를 잘 쓰다 보니 반가(班家)의 여흥에 불려가기도 하고, 불쑥 나타나 뭐랄까 분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런 행동을 재밌다며 즐기는 이도 있고, 분수를 모르는 괴승(怪僧)이라 비웃는 이도 있다 들었습니다. 아, 지금은 소식이 끊긴 지 꽤 되었습니다. 풍문에 삼척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이 선비를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렇군요. 혹여 다시 만나시거든 제가 만나고 싶어 하더라고 전해주십시오. 암자를 떠나게 되면 공(公)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어찌 떠날 때만 찾아오시려 하십니까? 아무 때라도 들려주십시오. 귀양살이를 한다지만 스님을 뵙는 즐거움까지 잃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후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천경의 머릿속을 떠도는 백운에 대한 염려 때문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암자를 떠나면서 젊은 선비가 다소곳한 음성으로 천경에게 말했다.

“스님의 처신을 두고 속인이 왈가왈부하는 게 송구합니다만, 스님만큼이나 저도백운의 앞날이 걱정됩니다. 고비 풀린 망아지를 세상인심이 마냥 지켜보진 않을 겁니다. 백운은 마치 백척간두의 위태로움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족쇄가 들씌워지기 전에 수습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천경은 그 우려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저 길게 합장만 했다. 봄풀 사이로 멀어져가는 선비의 곁에 칼을 쓰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백운이 겹쳐졌다.

그리고 또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백운에게서는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번은 삼척에서 만났던 젊은 선비가 어떻게 거처를 알았는지 인편에 서찰을 곁들여 시 한 수를 보내왔다.

밝은 호수가 가을빛이 걷히자 물은 하늘빛이고
바둑 마치니 넌출 그늘에서는 저녁 안개가 피어나네.
누대는 담담하게 대나무 숲 사이로 열렸고
스님은 의연하게 국화 꽃 앞으로 오셨구려.
맑은 술잔에 글 솜씨는 참으로 격식을 얻었으니
살아 있는 그림 시내와 산은 더욱 아득해집니다.
발우 들고 주장자 짚다가 세 해만에 다시 만났는데
불가와 아직도 인연 다하지 않은 것을 알겠소이다.

明湖秋霽水如天 棋罷蘿陰欲暮烟
淡淡樓開篁竹裏 依依僧到菊花前
淸樽翰墨眞相得 活畫溪山更窈然
甁錫三年重邂逅 空門還有未消緣 
-<시승 백운에게 주다(贈詩僧白雲)>

서찰은 스님의 당부를 전했는데, 만났는지 궁금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천경의 속내를 백운은 꿰뚫어본 것일까? 백운은 용케도 천경의 손길을 저만큼 피해 다녔다. 동아줄로 꽁꽁 묵어서라도 절간 말뚝에 박아두겠다는 그의 다짐을 간파한 모양이었다. 온몸을 마룻바닥에 묻고 부처의 대자대비를 갈구하는 날이 시나브로 늘어갔다. 부처님 전에 올린 등불이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꺼졌다.
그렇게 우두망찰 세월은 지나가는데, 기어이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이 절간 문을 넘어섰다. 눈발이 한없이 춤을 추며 대지를 지워나가던 겨울이었다.

탁발을 나갔던 행자승(行者僧)이 목탁마저 내던지고 저승사자를 만난 양 하얗게 질려 승방 문을 열어젖혔다.
“스, 스님. 큰일 났습니다. 어서 나와 보시시오.”

“누가 시주는 않고 쪽박이라도 깨더냐? 왜 이리 수선인고.”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을 들척이며 참구(參究)에 들었던 차라 농어(弄語)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행자승의 모골이 송연한 표정을 보자 입가에 걸렸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재 너머 골짜기에 스님 한 분이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허연 눈에 붉은 피, 몰골이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어, 어서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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