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몸을 일으켜 맨발로 행자승을 따랐다. 소란에 놀란 사람들이 우르르 그를 따랐다. 산문(山門)을 나설 때부터 천경의 뇌리에는 백운의 얼굴이 계속 맴돌았다. 골짜기에 피 칠갑을 한 채 쓰러져 있는 승려는 백운일 거라는 망념이 머리를 들쑤셨다.

, 이 무서운 예감이 부디 빗나가기를……

마른 가시에 찔린 발바닥에서 피가 솟구쳤다. 피는 눈을 적시고 흙을 물들이고 자갈을 덮었다.

몽둥이에 얻어맞고 칼에 찔리고 발길질에 걷어차인 한 사내가 바위 틈새에 구겨진 채 쓰러져 있었다. 눈발마저 이 흉물을 비껴 내렸다. 찢겨진 입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회색빛 승복을 적시는 피가 괴기스러운 빛깔로 번져나갔다. 반쯤 피로 뒤덮인 얼굴이었지만, 천경은 한눈에 그가 백운임을 알아보았다. ‘흰 구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승려의 몸뚱어리 어디에도 흰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고 넋을 놓고 있는 천경에게 먼저 눈길을 준 것은 백운이었다. 눈물로 얼룩진 천경을 보는 백운의 얼굴 위로 미소가 떠다녔다. 뼈마디가 다 부러진 백운이 눈짓으로 천경에게 손짓을 했다.

그것이 신호인 양 천경이 엉거주춤 걸음을 옮겼다.

, 자네 어쩌다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었다. 말이 허공을 맴돌다 흩어졌다.

천경이 움켜쥔 손에서 통증이 이는지 백운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백운은 많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업보

그 말을 끝으로 백운의 몸에서 육신의 증거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온기가 사라졌고, 눈에서는 총기가 스러졌다.

천경은 눈을 질끈 감고 마지막으로 세상을 보았을 뜬 눈을 감겼다.

산 사람은 울었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었다.

백운의 시신을 수습하고 화장을 치렀다. 그런 뒤 천경은 백운의 육신의 고향, 흰 구름이 영원히 머흘 곳, 남해로 길을 떠났다.

천경이 화방사에 닿은 지도 며칠이 지났다.

이젠 그칠 만도 한데 세상의 모든 흔적을 지우려는 듯 백설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남도 땅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물기라곤 한 점도 없는 눈은 메말라 부석거렸지만, 밟을 때마다 인내하던 몸부림을 온통 밖으로 짜냈다. 사람이 눈 속을 걷는 것이 아니라 눈 기둥이 사람에게 길을 여는 것 같았다.

사람은 죽은 뒤 고향으로 돌아와 최후의 안식을 얻는다.

분노와 갈망으로 세상을 휘젓다가 세상의 증오와 저주 아래 열반의 길로 들어선 백운이 돌아갈 곳은 고향 밖에 없었다. 뼈와 살과 피가 엉겨 육신을 만든 그 본연의 흙과 물, 바람 속에서 백운은 세상과 마지막 작별을 해야 했다.

이승의 부모를 여의고 처음 승복을 입고 발우를 씻으며 목탁을 두드리면서 경전을 외던 땅이 하얀 눈을 내려 백운을 품으려 했다. 흰 옷을 겹겹으로 입은 소나무 숲은 망운산을 향해 끝없이 뻗어 올랐다.

잠깐 발을 헛디뎌 휘청거리자 뒤따라오던 노인장이 부축했다. 혼자 가겠다고 했지만, 청맹과니 노인장이 부득부득 길을 따르겠다고 나섰다.

노인장은 어렸던 백운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동자승 몇이 있었지만, 백운만이 유독 불행하게 절밥을 먹게 된 아이는 아니었다.

대웅전 앞마당을 뛰어놀던 아가들 중 이 시님이 제일 몬저 고향에 돌아왔네예. 이제 부모님을 다 뵀을 테니 여한은 업실낍니더.”

누가 죽은 자의 한을 설명할 수 있을까? 미타찰(彌陀刹)의 낙원에서 번뇌와 무명(無明)을 영원히 녹여버렸다 해서 한 사람의 인생이 값졌다고 말해야 하는가?

천경은 산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나무함에 들어갈 이는 백운이 아니라 자신이어야 했다고 자책했다. 자신에게는 울타리를 부수고 넘어갈 용기가 없었음을 절감했다.

거진 올라왔나 보네예.”

등을 돌려보니 세상은 가없는 흰색의 장막이었다. 위도 없고 아래도 없고 옆도 없는 무색무취의 공간 속을 두 사람이 둥둥 떠 있었다.

눈보라 휘날리는 소리가 열반을 축원하는 독경이었다.

이런 눈 천지라니. 이 시님이 바로 귀인이었나 보네예.”

수행자라면 가야 할 무소유(無所有)의 구경의 땅에 백운은 이르렀다.

추위와 바람에 손이 곱아 나무함을 열기 어려웠다. 그러나 열린 함 속은 한여름처럼 따뜻했고 포근했고 완강했다.

회색 골분(骨粉)과 타고남은 뼛조각 몇 개가 다시 불길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뜨겁고 뜨겁게 살더니 아직 그 열기를 다 사르지 못했는가?’

골분은 흰빛의 빈틈을 물들이며 이승의 마지막 공간으로 흩날렸다.

그렇게 백운은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으로 향한 마지막 탁발 길에 올랐다.

천경의 입에서 언젠가 외었던 시 한 수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허깨비 몸이 머물기 어려워 물처럼 동쪽으로 흐르고

육십 년 세월이 부싯돌 불꽃에 불과했네.

지는 달 텅 빈 산에는 애가 끊어질 듯하고

싸늘한 등불 긴긴 밤에 눈물만 마르질 않아라.

평생 읽었던 경전도 티끌 먼지로 돌아갔고

다섯 갈래 선림이 서본들 조사의 가풍만 줄였을 뿐.

나보다 뒤에 왔다가 나보다 먼저 가는 이여

하늘의 도가 인정을 거스름을 비로소 알겠노라.

 

幻身難住水流東 六十年光石火中

落月空山臟欲斷 寒燈長夜淚無窮

一生貝葉歸塵土 五派禪林減祖風

後我而來先我去 始知天道逆人情 -<취송을 곡하다(哭翠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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