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시 종​​​​​​​소설가 / 재경향우
백 시 종
​​​​​​​소설가 / 재경향우

1967년 나는 전라도 광주에 있었다. 당시 1만 부가 팔렸던 『현대문학』 5월호에 나의 첫 단편 「해구(海拘)」가 발표되었을 때 일이다.

집으로 전보가 배달되었다. 발신은 소설가 정을병이었고, 내용은 전화 요망이었다. 당시에는 집 전화가 귀했던 시절이어서 부득불 우체국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 혹시 고향이 남해 아닌교?”

“맞습니다만…….”

“그럼 그렇지, 우리 남해 사투리가 그리 구수헐 수 없더라구. 나도 남해요, 나는 이동면 벅수골인데, 백형은 오디요?”

“저는 남면 평산리입니다.”

“그래, 지금 뭘하고 있소?”

“그냥 놀고 있습니다.”

“한창 일할 때 놀다니…… 아무튼 우리 고향 출신 후배 소설가를 만나 반갑소! 우리 자주 연락합시다.”

그러나 나는 태생이 남해이긴 하지만, 일찍 고향을 떠나 여수와 광주에서 성장했다는 얘기를 미처 전하지 못하고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났을까. 또 전보가 왔다. ‘이력서 휴대, 즉시 상경 요망’

장소는 남대문에 위치한 대한가족계획협회였다. 나는 그날 밤 기차로 서울역에 도착, 남대문 사무실을 찾았는데, 정을병의 직책은 홍보부장이었고, 당신 수하에서 일할 출판 담당 직원 공모의 실무 책임자였다.

그때만 해도 대한가족협회는 런던에 본부가 있는 국제가족계획연맹의 지역 단체여서 월급도 달러로 환산 지급하는 터라 모두가 부러워 하던 꿈의 직장이었다.

그래서일까. 벌써 세 사람의 지원자가 도착해 있었다. 모두 K대, S대 졸업증명서를 휴대한 아주 세렴된 젊은이들이었다.

나는 주눅이 들어 한쪽 구석에 있는 듯 없는 듯 앉아 있었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면접 같지 않은 면접을 끝낸 뒤 빨리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한 시간도 안 되어 최종 합격자 명단이 즉석에서 발표되었는데, 놀랍게도 그 주인공은 나였다. 정을병이 무슨 술수를 썼는지 사무총장, 이사장, 회장 결재를 득한 인사발령장을 나에게 전하며 말했다.

“백형, 책상은 저기요. 그리고 점심은 부서 직원들이랑 같이 할 예정이니까 그리 아시오.”

정말 나는 삽시에 대한가족계획협회 출판 간사직에 올랐고, 무려 10년 가까운 세월을 그곳에서 보내는 행운을 누렸다.

정을병은 그처럼 화끈한 사람이었다. 고향 남해와 관련된 일이라면 어떤 높은 벽도, 험한 개울도 뛰어넘는, 어쩌면 겁 없는 사내인 줄 몰랐다.

실제로 원칙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도 한치의 양보가 없지만, 예컨대 공동의 이익이 보장되는 사안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전진하는데, 제 몸을 아끼지 않는 투사 같은 스타일이었다.

행여 다칠세라 사고 현장 자체를 알지 못한다는 듯이 스스로 눈 가리고 저만큼 돌아가는 정의롭지 못한 요즘 시대에 ‘행동하는 정을병’이 새삼 그리워진다. 고향 방문이 잦은 여름 휴가철이라 더욱 그러하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