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은평구 수색역 앞에 가면 이봉길 사장이 운영하는 식당이 있다. 한때는 구청 앞에서 고깃집을 크게 운영하다 수색역 부근에 미니 빌딩을 사서 1층에는 식당, 2층에는 공방이 들어서 있고, 3층은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식당을 운영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내외가 직접 운영을 하는데 가까이에 MBC방송국이 있어 연예인들이 단골손님으로 찾아와 매상을 올려준다고 자랑을 한다.

수색동(水色洞)은 한강 하류로서 장마 때면 한강물이 이곳 앞까지 올라온 데서 유래된 지명으로 물치 또는 무르치라고 하였는데, 물이 차올라 마을과 벌판 등이 온통 물색으로 변한다고 하여 생겨난 지명이다. 한자명으로 水生里, 水色里, 水上里 등으로 표기된 것으로도 짐작을 할 수가 있다. 하늘공원은 수도권 쓰레기 매립장에 조성된 공원으로 가을이면 억새가 유명하여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다.  

이봉길 사장은 매일 아침 가까이에 있는 하늘공원을 한 바퀴 도는 운동을 하며 건강을 유지하는 노익장이다. 해마다 억새꽃이 만발하면 걷기 회원들을 초청해서 직접 만든 고향음식을 맛보게 하고 정감있는 대화의 장을 마련해 준다. 며칠 전에도 하늘공원에서 억새축제를 한다기에 걷기 회원 친구들과 함께 다녀왔다. 아직은 계절이 이른 탓인지 억새꽃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고 청명한 하늘에 뜬 흰 구름이 아리수를 따라 흘러가는 풍경이 무더웠던 여름이 막바지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가을이 되면 단풍보다 먼저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게 갈대와 억새인 것 같다. 물론 가을을 대변하는 코스모스도 있고 국화도 있지만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리지어 피는 것이 민초들과 닮은 모습이 있어 억새나 갈대를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은 갈대와 억새를 구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사진과 글이 다른 작품도 종종 보이고 친구들도 억새와 갈대를 놓고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억새는 억세다와 새(草, 풀 초)가 합쳐진 말로 억센 풀이라는 의미이고, 갈대의 고어는 ᄀᆞᆳ 대로 가늘고 길다와 대(竹)가 합쳐진 말로 가늘고 긴 대라는 의미이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친한 친구 사이인 억새와 갈대 그리고 달뿌리풀이 살기 좋은 곳을 찾아서 길을 떠났다. 즐겁게 가다 보니 어느덧 산마루에 도달하게 되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갈대와 달뿌리풀은 서 있기가 힘들었지만 억새는 견딜만 했다. “시원하고 경치가 좋네, 사방이 한눈에 보이는 것이 참 좋아, 난 여기서 살래” 하며 억새가 자리를 잡았다. 

갈대와 달뿌리풀은 추워서 산 위는 싫다고 하며 더 낮은 곳으로 가기 위해 억새와 헤어져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다가 개울을 만났다. 밝은 달이 물에 비치는 모습에 반한 달뿌리풀이 말했다. “난 여기가 좋아, 여기서 살 거야”하며 달뿌리풀은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갈대는 개울가를 둘러보니 둘이 살기엔 너무 좁았다. 그래서 달뿌리풀과 작별하고 더 아래쪽으로 걸어갔는데 앞이 바다로 막혀버렸다. 갈대는 더 이상 갈 수가 없어서 바다가 보이는 강가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억새는 전국 산야의 햇빛이 잘 드는 산이나 들에서 큰 무리를 이루고 사는 여러해살이풀이다. 키는 1~2m 정도 되며, 땅속줄기에서 뭉쳐난다. 잎의 가장자리가 까칠까칠하여 만지면 손을 베이기도 한다. 꽃은 9월에 피며 처음에는 연한 자줏빛을 띠다가 차츰 흰색으로 변하고, 다시 황금 갈색으로 변한다. 가을이 되면 억새 축제를 하는 곳이 많으며, 축제 끝에 억새를 태우기도 했는데, 역풍이 부는 바람에 화재로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난 이후부터는 태우지 못하게 함으로써 억새군락지가 많이 줄어들었다. 

반면 갈대는 강가나 바닷가에서 군집을 이루고 사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줄기는 마디가 있으며 키가 보통 3m 정도로 자라지만 조건이 좋으면 더 크게 자랄 수 있다. 땅속줄기가 있어서 옆으로 길게 벋어나가며 꽃은 8월 하순부터 9월에 걸쳐 피는데 자주색에서 자갈색으로 변하며 원추형의 꽃차례로 끝이 밑으로 처진다. 갈대라는 이름은 대나무와 비슷하게 생긴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갈대는 대표적인 수질 정화식물이며 꽃술은 빗자루, 줄기는 고리짝 같은 생활용품을 만드는 재료로 이용된다.

옛날 중국에 민자건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계모는 두 아이를 낳아 자기가 낳은 아이들만을 귀여워하고 전실 소생인 자건은 천대하였다. ​추운 겨울에 동생들에게 두툼한 솜옷을 입히면서도 자건에게는 갈대의 이삭에 붙은 털을 넣어 만든 옷을 입혔다. ​자건은 추위에 떨며 겨울을 지내야만 했지만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견디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며 계모를 쫓아내려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자건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께 간청하기를 “어머니가 계시면 아들 하나가 추우면 그만이지만 어머니가 안 계신다면 아들 셋이 떨게 됩니다.” 하고 하며 아버지께 간곡히 청을 올렸다. ​자건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자건의 착한 마음씨에 탄복하여 계모를 용서하였다. ​계모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는 그 후부터는 자애로운 엄마로서 동생들과 다름없이 자건을 사랑하였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흔들리며 사는 갈대와 같다. 권력이나 돈에 따라 흔들리고 사상이나 종교에 따라 흔들리고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흔들리며 사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억새와 갈대는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억새는 자존심의 상징이고 갈대는 지혜의 상징이다. 어떤 이는 억새처럼 살아가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단단함을 선택하고 세상과 맞서며 꺾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 강인함이 때로는 존경스럽지만 너무 오래 버티다 보면 스스로 다치게 된다. 어떤 이는 갈대처럼 살며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몸을 낮춘다. 겉보기엔 쉽게 휘어지는 것 같지만 그 유연함이 자신을 지켜준다. 

인생은 어느 시점에서는 억새처럼 살아야 하고 또 어떤 때에는 갈대처럼 살아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 꺾이고 언제 휘어져야 하는지를 아는 마음이 중요하다. 억새의 강인함과 갈대의 유연함 그 사이에서 우리는 조금씩 성숙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진다. 노을과 백발의 억새꽃이 한편의 시처럼 또 한해를 장식하는 마지막 장면을 연출하는 자리에 서있는 나도 하나의 소품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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