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새로운 상대를 만나게 되면 나이를 따져서 관계를 확실하게 하려는 생각을 가진다. 이런 현상은 나이가 들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지하철의 경로석에 앉아있는 앳된 늙은이를 보면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는 불편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이를 묻는 경우도 가끔 보게 된다. 물론 우리나라가 어렸을 때부터 장유유서의 교육을 받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서열을 따지는 문화가 사회 전반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같은 해에 태어나도 생일을 따져서 서열을 정하기도 하고 학교의 선후배나 군대의 선후배는 하늘과 땅이다. 그러나 객지 생활에서의 나이는 고무줄 나이라고 할 정도로 필요에 따라 나이를 줄이거나 늘리는 경우가 있다. 숨긴 사실이 뒤에 밝혀져 곤혹을 치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한번 웃고 넘어간다.
옛날에는 시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나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는지 송나라 유학자 주자가 쓴 소학(小學)과 조선 중종 때 박세무 등이 엮은 동몽선습 같은 초등교재의 “붕우지교” 항목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年長二倍(연장이배) 則父事之(즉부사지), 十年以長(십년이장) 則兄事之(즉형사지), 五年以長(오년이장) 則肩隨之(즉견수지)”
‘나이 차이가 배가 되면 어버이처럼 섬기고, 10년이 많으면 형처럼 섬기고, 5년이 많으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따라간다.’ 즉 ‘5년 정도의 나이 차이는 친구처럼 지내라’는 뜻이다.
나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교제하는 벗을 나이를 잊는 친구 사이라는 뜻으로 망년지우(忘年之友)라고 하며 망년지우로 사귈 수 있는 나이가 상팔 하팔(上八下八)이라는 말도 있다. 위로 여덟 살, 아래로 여덟 살 까지는 친구로 지낸다는 뜻이니 상당히 넓은 폭을 말하고 있다.
나이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의 라이(rai, rye), 기장이나 호밀을 칭하는 말에서 온 것이며, 살은 산스크리트어의 쌀(sal)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쌀이나 기장은 일 년에 한 번 추수를 해서 먹기 때문에 몇 번을 추수해서 먹었는가를 기준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그 외에도 춘추(春秋)라는 말 역시 봄가을을 몇 번 넘겼는가를 뭇는 것이니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망구들이 서울에 정착을 하기 시작한 것은 시골에서 중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왔으니 객지 생활이 60년을 넘어가고 있다. 인생의 황금기를 객지에서 살다보니 성공한 사람도 있고 어려운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로 팔십을 넘어 구십을 바라보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 ‘망구’를 설명을 하지 않으면 비속어라고 생각을 할 것 같아 설명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망구는 사람의 나이를 칭하는 말이다. 할망구는 한(크다, 많다)+망구의 합성어로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이를 대변하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공자의 논어 위정 편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일찍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큰 뜻을 세웠으며, 마흔 살에는 삿된 것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는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에는 귀가 순리를 이해하여 남의 말을 듣기만 해도 모든 이치를 깨달을 수 있었고, 일흔 살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내키는 대로 따랐지만 법도에서 어긋나지 않았다.” 이로부터 15세를 지학(志學), 30세를 이립(而立), 40세를 불혹(不惑), 50세를 지천명(知天命), 60세를 이순(耳順), 70세를 종심(從心)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공자는 71세(기원전 551-479)에 사망했음으로 팔십이나 구십에 대한 말은 없다. 공자가 지금 시대를 살았다면 무엇이라고 했을까 궁금하다.
이외에도 나이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20세를 약관(弱冠), 60세를 환갑(還甲), 70세를 고희(古稀), 77세를 희수(希壽), 88세를 미수(未壽)라고 하며 앞선 나이를 바라보는 나이라는 뜻으로 망육, 망칠, 망팔, 망구, 망백(望百)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나이가 망구라고 생각을 하니 소풍을 끝내고 귀천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실감을 하게 된다.
1962년부터 민법상 만 나이를 사용하게 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세는 나이를 쓰는 경우가 많고 이 방식으로 나이를 세는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하여 가끔 혼란이 생기기도 한다.
옛날에는 나이 차이가 좀 있어도 서로 친구로 지낸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조선시대의 오성과 한음 이야기다.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것은 과거시험장에서 처음 만나면서 시작 되었고, 그때 오성 이항복은 22세, 한음 이덕형은 17세 이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를 죽마고우(竹馬故友)라고 하는데 이는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 놀던 친구라는 뜻이지만 오성과 한음은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 류성룡과 이순신도 세 살 차이였고 어린 시절부터 깊은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 또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였던 겸재 정선도 자신보다 다섯 살 위인 시인 이병연과 평생 친구로서 여든을 넘길 때까지 시와 그림을 통해 우정을 나누었다.
한 살 단위로 서열을 가리는 문화가 생겨난 것은 일정한 나이에 학교에 입학하는 학령제가 도입된 후부터라는 주장이 있지만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나이 많은 동급생이 꽤 있었고 졸업을 하기도 전에 시집을 가는 학생도 있었기 때문에 한 시점을 기준으로 말할 수는 없다. 또 조선의 교육은 서당이나 향교에서 유학교육을 남자 중심으로 하였기에 과거에 급제를 하거나 나이가 들면 그만 두거나 책 한 권을 끝내면 책걸이를 하는 것이지 졸업은 없었다.
사실 망구들은 인생의 종착역에 가까워진 사람들이다. 늙어가든 익어가든 무언가 결과물이 있어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오래 살 거라고 한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누워서 보내는 병상 늙은이가 되는 것 외는 별도리가 없다. 건강한 노인으로 삶의 즐거움을 느끼고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걷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