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람이 태어난 순간,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로서 누릴 자유의 마음은 독보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라도 홀로 살아갈 수 있는 경우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삶 자체를 위한 공존보다 생명 보존 차원에서의 공존이라는 보다 확대된 개념의 공존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죠프레이 츄의 구두끈 이론은 하나의 독립된 입자로 보이는 것도 사실은 다른 것들의 존재에 의존해 있으며, 이 의미는 다른 모든 존재의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각각은 따로 분리된 존재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서로는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홀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요, 우주의 섭리와 생성의 영향을 받으며 선대 조상과 후손의 삶이 나에게 이어져 오늘,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공존의 유기체입니다.
공존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말이나 글로써 나타낼 수는 없지만, 우리는 늘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장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햇빛과 달과 별의 작용은 우주 전체와의 공존이요, 이러한 작용 속에서 생성되는 물, 흙, 나무, 산, 강, 바다의 작용은 단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생명의 공존 그 자체입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삶의 관계에서 하늘과 땅, 산과 바다, 자연 현상에 내재한 섭리, 물리적 작용, 창조와 진화, 인과의 시작과 맺음, 자기 입자의 형성과 소멸, 대기의 순환과 절기의 변환, 조상의 삶, 후손과의 연계는 변함없이 이루어지는 공존의 실체이며 우리는 일상에서 이를 어김없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과나무를 한 그루 심으면 이때부터 공존의 감성이 발현됩니다. 사과나무가 자라 사과가 맺어지기까지 땅과 하늘과 태양 그리고 달과 별의 공존 그리고 이슬과 비, 바람과 공기와의 공존은 필연의 법칙입니다. 사과나무에 열린 사과를 사람이 먹어 피와 살이 되고 그 분비물은 대지와 변용합니다. 대지 속 흙의 성분에는 사과의 잔재가 들어있습니다. 그 잔재로부터 다시 생명이 시작됩니다. 바로 사과나무의 재탄생입니다. 태양과 달, 별과 흙의 자양분이 사과를 생성시키고 이 사과를 먹은 사람이 후손을 탄생시키는 과정은 서로 돕고 돕는 공존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기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공존 작용을 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 혼자라는 의식이 작용하여 나타나는 결실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와 네가 하나의 실체로서 교감하며 살아가는 공존의 질서가 없으면 생명은 한시라도 살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내 생각의 범주를 고집하거나 내 의견이 무조건 옳다는 독단적 사고를 지니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행보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좀처럼 도무지 변하지 않은 사람, 고집이 센 사람이라는 평가가 과연 옳은 것인가는 차치하더라도 그러한 현상이 주위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내가 살아남고자 남을 죽여야 하는 것이 상용화(말로서, 생각으로서, 감정으로서, 무언의 행동으로서)된 듯하지만, 이로 인해 자신도 함께 죽고 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공존 부재의 치명적 결과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어떤 일을 해도 만족할 수 없는 허전함, 무엇으로 채운다 해도 충족되지 못하는 아쉬움에서 불안이 가중되고, 무언가 불안하다는 것은 생명이란 공존을 통하여 협업과 상생과 조화로서 생명을 영위하는 이치에도 배치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공존 부재의 후유증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지만, 감사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추석은 한해 결실을 이룬 공존의 미덕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차례를 지내는 의미있는 명절입니다. 차례를 지내는 것은 모든 현상이 나에게서 우주로, 우주에서 나에게로 오가는 공존의 의미에 감사의 예를 올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음식을 많이 차려 놓고 절을 해도 그것은 피상적인 행동일 뿐, 선대 조상의 삶 자체가 공존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공존의식이 부재한 상태에서 기분이나 감정마저 온전치 못하다면 이야말로 조상을 크게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대의 삶은 곧 후손의 마음과 공존하므로 후손의 마음이 상하면 선대 조상이 상하는 것이요, 후손이 분노하면 선대 조상이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에서 나에게서 가장 무서운 적은 어쩌면 공존의 역량을 지니지 못한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의 적이라니, 이게 웬 가당치도 않은 말이냐고 일갈할지라도 따지고 보면 우리 삶의 대부분이 나의 생각이나 관점으로 남을 죽이는 일을 수없이 반복하여 온 공존의식의 부재로부터 갈등이나 불행이 시작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위가 빌미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면, 당사자도 피해를 입겠지만, 자신도 피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경쟁이 도식화된 세상이라는 편견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지만, 뜻밖으로 선행의 공존 활동이 우리 인체 내에서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의 작용이 그렇습니다. 세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삶과 죽음을 오가고 있지만, 이러한 와중에도 자신을 희생하면서 주인의 신체를 회생시키려는 헌신적 세포도 있습니다. 어느 한 세포의 희생을 통하여 세포를 회생시키는 의식이 주인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공존의식의 구체적 사례를 볼 때, 그 주인인 사람의 공존의식은 어느 정도일까요.
우주 전체가 나를 구성하는 신성(神性)의 경지인 점을 비출 때 우리는 얼마만큼 공존의 의지로서 신성에 이르도록 정성을 다하고 있나요. 이때의 신성이란 본래 나의 성정은 신의 경지와 같은 아름답고 순수한 성품을 소유하고 있는 신의 섭리 그 자체입니다. 신성이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세상을 주관하는 내 안에 잠재해 있다는 뜻입니다. 아니 신성이 내 안에 있다니!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내가 신성이었으며, 그 신성이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신, 육체에 산재해 있다는 공존 감각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다면 세상은 경이로움 그 자체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공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 자신과의 공존이 아니겠습니까? 나와의 공존은 나와의 소통이며 그 공존의 결실은 신성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러한 공존 감각으로 내가 신성을 유지하면 나와 만나는 모든 생명이 신성으로 화해하고, 그러한 기운이 연결되어 산천초목이 자연스럽게 신성의 기운으로 성장하여 내재한 모든 생명과 선대 조상은 물론 지구와 우주마저도 신성으로 동반 성장하게 된다면, 이처럼 아름다운 공존의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