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사 묘정비에 눈길이 머무나니
당대의 역사 문화 정치 사회 문학까지
마멸을 멈추어야 할 보물섬의 서사시
당대의 거목들이 유배지 남해에서 혈서처럼 써 내려간 작품들을 조명해 보고 그 시대에 어떤 고초를 겪으며 어떤 정신세계를 열어갔는가에 대한 것과 그 당시 작가들이 백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아보는 것은 대단히 흥미 있는 일이다. 더구나 지금 기록해 놓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질 비하인드 스토리를 탐구하는 것은 역사가뿐만 아니라 그 역사가 존재했던 곳에 몸을 담고 구전과 전설을 수집하며 일부 노출된 성벽이나 유적을 직접 만지며 스쳐 지난 사람들의 체험담은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료가 될 수 있다.
필자 자신이 한국 문단에 이름을 올린 시인이라는 인연 때문에 필자는 유배객이 치열하게 써 내려간 글에 더욱 매료되었고 문학에 눈을 떠 습작기를 거쳐 등단하기까지 그분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내 고향 마을 죽림 속에서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기에 그것이 필자의 시적 감성을 키워주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봉천사 묘정비의 비문은 그 내용을 자세히 뜯어보면 인문학적 관점에서 역사, 문화, 문학, 정치, 사회가 총 망라된 남해의 위대한 보물이요, 당대의 거유가 써 내려간 한 편의 서사시다. 그 비문을 간직한 큰 비석이 서 있는 자리도 내 고향 마을이고, 그 비석의 주인공이 유배되어 살면서 백성을 가르쳤던 곳도 나의 고향마을 죽산(竹山)이니 필자가 남해유배문학을 말할 때는 시대의 선후를 떠나 자연스레 비문에 새겨진 인물을 먼저 찾아뵈옵고 그의 작품 매부(梅賦)를 떠올리는 것이다.
비문이 많이 마모되었다. 비각을 만들어 모셔야 할 이 보물을 그대로 비바람 눈보라와 뜨거운 태양열에 쉬이 마멸되게 그대로 둠은 문화재 보호차원의 자세가 아니다. 남해유배문학관으로 옮길 적에 했어야 할 일인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남해에서 문학작품을 남긴 유배객 중에서 문학작품에 있어서는 단연 서포 김만중 선생이 어느 유배객보다 위상이 높으나 다양한 계층과 접촉하면서 습감재(習坎齋)라는 서당을 열어 지방민에게 충신효제(忠信孝悌)를 가르칠 정도로 인문학적 큰 족적을 남긴 이는 소재(疏齋) 이이명(李頤命) 선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