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松 감 충 효
시인/칼럼니스트

봉천(鳳川), 파천(巴川), 망운산(望雲山)이라는 지명은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花田別曲)에 존재하고 소재 이이명이 매부(梅賦)를 지은 곳과 적소도 봉천변 주변이었으며 남해유배문학관이 세워진 곳도 바로 망운산 자락이 <강진바다>쪽으로 물길을 펼친 이 봉천변이다. 거기다가 서포 김만중의 적소에 있던 매화나무 두 그루를 그의 사위인 소재 이이명 선생이 옮겨와 심어서 키운 곳도 적소로 추정되는 읍성의 죽산리 당산 매원 주변의 습감재(習坎齋)임을 생각할 때 남해읍성과 봉천변 주변은 유배문학의 메카임이 틀림없다. 

겸재(謙齋) 박성원(朴聖源, 1697~1767)이 기로소에 들겠다는 영조의 뜻에 반대하다가 남해로 유배형을 받아 1744년 8월 30일부터 1745년 1월 6일까지 15개월 정도의 짧은 유배기간 동안 300편이 넘는 한시를 남겼는데 그의 한시 중에 그의 적소 서편에 망운산이 있고 바다에 그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내용이 나오고 거처의 죽림 속 대나무를 의인화 하여 지은 시가 많다. 이런 시적 배경을 볼 때 그의 적소는 읍성의 동쪽으로 대가 많은 동네 죽산리가 아니었을까하는 유추를 해 보게 된다. 어떤 이가 쓴 남해유배문학 기행문에 보니 겸재 박성원의 적소를 읍성 죽림마을(죽산리)의 지금 남해대학 기숙사 죽림부근으로 적시하며 대가 무성한 담벼락 사진도 게재하기도 하였는데 역사적 기록인지 무슨 유물이 발견되었는지 구전을 통한 것인지 필자 자신도 알 길은 없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필자는 박성원의 시에 녹아있는 여러 심상으로 봐서 가장 근접한 마을은 오래전부터 죽림이 우거진 죽산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것 뿐이 아니다. 남해의 풍속을 담은 기행문인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을 지은 후송(後松) 유의양(柳義養)의 적소도 읍성 남문 밖(현, 남해읍 남산동) 김시위의 집이었고 그 남문 밖은 다름 아닌 죽산과 연결된 봉천 상류쯤이고 조선시대 죄인을 가두는 감옥소가 있었던 곳이다. 그는 54세 때인 영조 47년(1771년)에 홍문관 수찬, 부수찬을 지내다가 삭탈관직 되어 남해로 유배되어 왔다. 노량 나루에 접한 충렬사를 참배하고 싶었지만 신분상 이를 억제하고 남해읍으로 들어와 선소의 장량상동정마애비 앞에서 충렬사 헌시(忠烈祠 獻詩)를 읊어 그의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에 남기게 된다. 그는 천리 먼 길 낮선 곳에 귀양을 와서 살았지만 전직 고관의 금도와 기개를 잃지 않았고 청렴결백, 안빈낙도 등 그의 높은 지조를 글을 통하여 알 수 있기에 후세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후송 유의양은 대충 10편 정도의 글을 남해문견록에 남겼다. 그가 남긴 남해문견록은 순수한 국문자에 의하여 최초로 남겨진 한글기행문체로 아주 소중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당시 해중 낙도였던 남해의 풍경, 풍습, 인심, 산물 등의 기록은 한 고을의 향토사와 다름 아닌 아주 중요한 보물섬의 보물이다. 

이와 같이 당대의 거목들이 우리 고향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고매한 가르침이나 유배문학을 남긴 인문학과 국문학사의 그 역사성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조정에서 유배객들에게 내린 ‘절해고도 위리안치’라는 형벌이 말해주듯이 말 그대로 우리 고향은 그런 곳이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유배객들은 우리 고향 남해를 배경으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이른바 유배문학이다. 고즈넉하고 정갈한 강진바다에 비친 읍성 고을의 정경을 겸재 박성원은 ‘서편에 망운산이 있고 바다에 그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묘사하였고 그 시심이 그의 적소가 있던 이 읍성의 죽림마을에서 발원되었다. 운치가 있지 않은가? 읍성을 배경으로 한 이러한 유배문학은 영원히 받들어 모실 우리 남해의 진정한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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