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松 감 충 효​​​​​​​​​​​​​​시인/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
​​​​​​​시인/칼럼니스트

남해에 유배문학을 뚜렷이 남긴 대표적인 인물로는 6명 정도로 압축된다.

자암집에 화전별곡 등 수많은 시를 남긴 자암(自庵) 김구(金絿)를 필두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라는 불후의 명작 소설과 어머니를 위한 시를 남긴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망운산과 금산에 올라 고향을 생각하며 고향을 그리는 시를 남긴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장인 김만중을 생각하며 매부(梅賦)를 쓴 소재(疎齋) 이이명(李頤命), 남해의 풍속을 담은 기행문인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을 쓴 후송(後松) 유의양(柳義養), 15개월 정도의 짧은 유배기간 동안 300여 편의 한시를 남긴 겸재(謙齋) 박성원(朴聖源)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목한다. 문학작품을 남긴 6명의 유배객 중에서 문학작품에 있어서는 단연 서포 김만중이 어느 유배객보다 위상이 높으나 다양한 계층과 접촉하면서 습감(習坎)이라는 서당을 지어 학문을 가르칠 정도로 인문학적 큰 족적을 남긴 이는 소재 이이명이다. 그의 문집 소재집(疎齋集)에 들어있는 유배문학 작품 매부(梅賦)와 남해에 남긴 그의 인문학적 족적은 다음에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유배를 온 시대 순으로 보면 자암(自庵) 김구(金絿)가 맨 먼저다. 자암 김구(1488~1534)는 조선 중종 때의 명신이자 서예가로 조광조 등과 함께 도학정치를 통한 개혁에 앞장서면서 1519년(중종 14) 32세의 젊은 나이에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다. 그러나 그해 남곤, 심정 등의 훈구파 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인해 개화파 조광조와 연루된 김구는 개령(開寜:경북 김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후 적소 남해로 이배되어 오게 된다. 32세의 젊은 나이로 혼탁한 사회를 개혁하고자 혼신의 힘을 기울이다가 수구세력들의 반발에 부딪쳐 유배길로 나선 자암은 개령에서 남해로 오는 도중 진주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허탁의 집에 유숙하기도 했다. 다음은 진주에서 길을 잃고 지은 시 4수 중 첫 수이다. 

길을 잃어 사방 분간 어려운데 밤은 이미 깊어/흙탕길 무릅쓰고 걸어 홀로 되었구나/산을 가로지르니 마음 진실로 감당키 어렵고/솔문 깊이 드니 탄식소리도 안들리네.

자암은 진주에서 하룻밤 묵은 후 길을 떠나 현재 남해대교가 놓아진 하동군 금남면 노량앞바다에서 조각배를 타고 설천면 노량리에 도착하어 13년간의 긴 유배생활을 시작하였다.

자암은 음률에 밝아 장악원 악정(樂正) 벼슬을 한 적도 있을 만큼 풍류에 뛰어났던 인물이다. 지면 관계로 총 6장으로 된 화전별곡중 남해의 경치와 교우를 읊은 제1장을 소개하고 한글 해설을 붙여본다.

제1장은 화전의 경치를 신선의 섬으로 비유하여 읊은 내용으로

天地涯 地之頭 一點仙島/左望雲 右錦山 巴川(봉내) 高川(고내)/山川奇秀 種生豪俊 人物繁盛/偉 天南勝地 景 긔 엇더 ᄒᆞ니잇고/風流酒色 一時人傑 再唱/날조차 몇분이신고

가없는 하늘 끝없는 지평선에 한 점 신선이 사는 섬/왼쪽은 망운산 오른쪽은 금산, 봉내와 고내가 흐르네/산천은 수려하고 호걸 남아 많이 나서 인물 번셩하네/아 하늘가 좋은 곳 그 경치는 어떠한가/풍류주색 즐기는 한때의 인물들이(재창)/아, 나까지 몇 분이나 되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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