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松 감 충 효시인/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시인/칼럼니스트

읍성의 흔적들이 손짓하고 있음에도

수 백 년 읍성 밑돌 가지런히 있음에도

그것을 묻어야 하는 새털 같은 무게여

봉천이라는 큰 하천은 넘실대는 물결처럼 필자의 추억이 많이도 출렁거리던 곳이다. 여름 날 멱 감으며 고태기와 송사리와 가재를 잡던 일과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날이면 아버님을 따라 봉천 지류에 대발을 치고 강진바다로 향하는 참게와 뱀장어를 한 바구니씩 잡던 일을 반추해본다. 봉천이 끝나는 곳의 강진바다는 온갖 해산물과 해초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해초 사이로 자맥질해 들어가면 소라와 피조개 새조개들이 발과 손에 스친다. 빈소라 고둥에는 낙지가 한 마리씩 들어 앉아 있기도 하였다. 밀물이 봉천까지 밀려 올 때는 당숙께서 숭어잡이 삼망거물을 치시는데 지능이 비교적 높은 어떤 숭어는 그물을 만나면 훌쩍 뛰어 올라 봉천 쪽으로 내달리곤 했다.  

어린 시절의 죽산 마을과 봉천주변의 이러한 목가적인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른 역사적 큰 흐름이 이곳에서 존재하고 있으니 이를 간과하고서는 이 글을 쓰는 큰 의미가 없다. 우리 남해의 읍성은 다른 곳에서 쉽게 만나지 못하는 유배문학의 원류가 흐르고 있다. 읍성은 그야말로 보물섬 남해가 자랑하는 보물중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으니 그 인물과 사연과 작품 속으로로 독자 분들과 같이 들어가 보기로 한다.    

조선 숙종 조 국문학사에 금자탑으로 빛나는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 선생이 유배를 온 남해 노도 적소에서 적적한 앞마당을 바라보다가 한양의 옛집에서 선비들과 함께 바라보던 서재 앞에 서있던 매화나무를 생각하며 이곳에 두 그루를 심어 가꾸며 적적하고 황망한 마음을 달랬다. 김만중 선생의 사위가 되는 소재 이이명 선생도 몇 년 뒤 사화에 연루되어 남해로 유배를 와 이곳 읍성의 죽산리 부근에 적소를 정하고 장인의 적소인 노도로 가보니 장인인 서포 김만중 선생은 이미 이 곳 적소에서 유명을 달리하고 널이 선산으로 옮겨 간 뒤였으니 망연자실 큰 슬픔을 가눌 수 없었다. 장인의 적소를 돌아보던 중 장인이 키우던 매화 두 그루가 주인을 잃고 시들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장인이 키우던 매화나무 두 그루를 소재 선생은 자기의 적소로 옮겨와 키우니 이 매화나무는 마치 옛 주인을 만난 듯 힘을 얻고 꽃을 피워 튼실한 매실을 달았다는 내용의 글을 지었으니 이것이 바로 현존하는 매부(梅賦)이다. 

정치적으로 불의에 항거하며 임금 앞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오로지 곧은 선비정신으로 조정을 바로잡고자 했던 두 분의 정신이 서로 감응하여 지어진 매부(梅賦)는 그 가치가 어느 문학작품보다도 고도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글이라서 후세에 크나큰 감동을 준다. 

소재 선생이 적소에 습감재(習坎齋)라는 현판을 걸자 남해 유생들은 물론 인근 사천 하동의 유생들도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9대 손으로 조정의 영의정 벼슬까지 올랐으니 이 명문대가의 정승에게 가르침받기를 원했을 것이다. 산청의 토호 선비로 특히 사천과 하동에 걸쳐 문하생을 배출하였던 직하재(稷下齋) 문헌상(文憲尙:1652~1722) 선생은 자주 습감재를 찾아 왔던 선비로 후에 이이명 선생이 사사(賜死)받을 무렵 운명을 같이 한 인물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그 시대의 당쟁은 피도 눈물도 없었고 체면도 도덕성도 없는 잔인무도하고 악랄한 이전투구의 양상이어서 그 회오리 속에서 참으로 아까운 인물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초를 당하였는데 소재 이이명 선생 역시 그러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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