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松 감 충 효시인/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시인/칼럼니스트

망운산 맑은 물이 읍성을 감고 돌때

봉천에 실려 오는 매화향기 넘실대니  

매부(梅賦)는 서포 소재의 한이 서린 초혼가

조선 개국 이래 가장 당파 싸움이 심했던 조선 숙종 조 정변의 회오리는 한양의 한 가운데에서 일어났지만 거기에 휘말렸던 인물들은 산간벽촌 오지와 절해고도로 내쳐졌다. 그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영의정 소재(疏齋) 이이명(李頤命) 선생은 우리 고장 남해로 유배되어 왔는데 그 적소가 남해읍성 주변의 죽산리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소재 이이명 선생의 사후에 건립된 봉천사 묘정비 비문에 새겨진 내용에 봉천사 위치의 기록이 있고 구전과 전설을 근거로 한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정조 경신년(1800년) 섬의 인사들이 진양의 선비들과 힘을 합쳐 습감재(習坎齋) 옛터에서 2~3리 떨어진 곳에 사당을 세웠다. 이 사당이 봉천사(鳳川祠)이고 그곳에 1828년 봉천사 묘정비(鳳川祠 廟庭碑)를 세우게 되었다.’ 또한 ‘남해현의 동쪽에는 죽산리(竹山里)라는 마을이 있고 그 아래 봉천이라는 내가 흐르고 있다. 비의 위쪽에 봉천사가 있다.’ 습감재는 죽산 마을의 당산 주변으로 추정되니 소재 이이명 선생과 관련된 습감재와 봉천사가 존재했던 죽산리(竹山里)라는 지명은 여러 문헌과 비문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경상도 지리지에서는 남해읍성의 이전 과정에서 그 중심지로 적혀있기도 하다. 즉, 경상도 지리지 곤남군조를 살펴보면 읍성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종 19년 남해를 복원하여 읍을 두었고, 세종 21년(1439) 화금현산성에서 죽산리(竹山里)로 읍성을 이전 축성하였는데 기존의 읍성이 비탈진 곳에 있어 옮겼다. 세종 21년(1439)에 읍성을 설치한 곳이 바로 군청이 위치한 곳이다. 읍성의 최초 제원은 문종 원년(1451)「청경상충청각관성자척량계」라는 보고서를 정이오의 아들 충장공 정분이 성곽의 둘레 2,806척, 높이 12척, 해자 3,37척, 여장, 성문 3, 적대, 옹성 등을 상세히 보고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둘레가 2,876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세조 5년 성문을 하나 더 축성함으로써 70척이 늘어난 것이다. 임진란이 지나 영조 정축년(1757) 남해현령이었던 조세술이 무너진 곳을 다시 견고하게 쌓았다. 일제강점기에 존재했었던 흔적을 조선전도를 통해 확인 가능하며 지적도에 남아 있다. 그러나 죽산리(竹山里) 일대 언막이 공사와 봉내천 범람에 따라 헐어서 사용되었고 큰 기단석은 활용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남아 있거나 건물 아래 묻혀 있다.】 <남해군지 상권, 2010년 발간. P.213>

세종 21년(1439)에 화금현산성에서 죽산리로 읍성을 이전 축성하였다는 내용과 읍성을 설치한 곳이 바로 군청이 위치한 곳이라는 상반된 내용이 기술상의 오류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기록된 데는 다른 까닭이 있을 것이다. 지금의 군청이 있는 자리가 죽산리에 속해 있었을 수도 있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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