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松 감 충 효시인/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
​​​​​​​시인/칼럼니스트

앞의 세종 때 경상도 지리지 곤남군조의 기록에서 ‘죽산리 일대 언막이 공사에 읍성을 헐어서 사용했다’는 역사적 현장을 필자는 봉천에서 멱 감으며 성벽 돌로 추정되는 잘 다듬은 어마어마한 큰 돌들 밑에서 미꾸라지 묶은 대꼬챙이로 손바닥 보다 큰 참게와 가재는 물론 팔뚝만한 뱀장어를 많이 꼬셔내었다. 봉천의 언막이로 하마정들과 파천들에 홍수가 밀려오는 것을 막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한다. 그 때 농사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 하여 치수에 치중할 때이고 우리 조상들은 그 때 어떻게 홍수를 막아 마을과 농토를 지켰는가를 후대는 알아야 한다. 

이것이 곧 읍성의 역사요, 남해의 역사이며 우리 조상들의 삶의 궤적이기 때문이다.

망운산 줄기가 읍성을 가로 질러 강진 바다 쪽으로 뿌려놓은 묏부리는 봉강산, 윗 당산, 아랫당산과 동(東)뫼인데 홍수 때 봉천물이 내리치는 힘으로 동뫼 큰 바위 밑은 아주 깊었다. 물속으로 자맥질해서 들어가면 바위 틈새로 큰 굴이 있었다. 그 당시 그 굴속으로 몸을 들이밀면 짚단만한 잉어가 파랗고 큰 눈을 굴리고 있는 잉어와 만나려면 폐활량은 물론 체력과 담력이 커야 가능한 일이었다. 필자는 잉어를 만져보려고 더 깊숙이 몸을 넣었다가 큰 잉어가 굴을 박차고 나오는 바람에 물속에서 온 몸으로 잉어의 매끈한 피부와 접촉했던 추억이 있는 곳이다. 봉천은 읍성 동문 안과 남문 안에서 강진바다로 나가는 길목이었으니 읍민들의 빨래터요 휴식공간이었으며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였다. 여름 날 물속에 오래 있다가 입술이 파리해지면 햇볕에 달구어진 이 큰 바위에서 뒹굴며 몸을 말리던 추억이 새롭다.

봉천의 하류인 동뫼의 끝 부분에 자리한 용왕바위 주변은 많은 물이 급경사로 굉음과 함께 무서운 소용돌이로 내리쳐 더욱 깊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용왕바위 안쪽의 논을 ‘용왕마지기’라 불렀다. 경상도 지리지 곤남군조의 기록에 나오는 성을 헐어서 쌓은 큰 돌들은 지금은 모두 콘크리트의 옹벽 속으로 묻혀 버렸다. 읍성의 남문 밖을 흐르는 남산다리와 입현다리 사이의 방천에도 엄청나게 큰 돌들이 박혀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읍성의 성벽 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봉천 하류의 용왕바위는 봉천의 거센 물줄기를 막아 언이 터지지 않게 용왕마지기를 지키던 고마운 바위였다. 그 바위가 용왕바위 또는 정승바위라고도 전해왔으며 동네 안쪽으로 도 당산 아래 큰 바위가 있는데 정승 비릉뱅이라 불렀으며 해마다 동제를 모시는 곳이기도 하다. 두 개의 큰 바위에 왜 정승이라는 명칭이 들어갔는지는 필자도 알 길이 없다. 다만 동제모시는 정승 비릉뱅이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막강하고 유서 깊은 용왕마지기 지킴이 용왕바위는 봉천의 직강공사 때 파괴되어 없어졌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이곳에서 친구들과 멱을 감았고 동네 김참봉 어른께서 멱 감을 때 벗어놓은 옷을 모두 감추시곤 하셨다. 그 이유는 너무 깊어 위험하고 용이 놀았던 신성한 곳이라는 것이었다. 옷을 돌려주신 김참봉 어른은 용왕바위 옆 잔디밭에서 해동명장전 이야기와 우리 동네에 귀양 오신 조정의 정승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가정하여 유배문학 [매부(梅賦)]를 남긴 이이명 선생이 왕이 되려한다는 간신들의 모함이 진실이었다면 참봉 어른이 들려주시던 이야기는 용이 못된 이무기에 대한 이이명 선생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하는 가정도 해 본다. 이 용왕바위 밑으로 용굴이 있어 강진 바다 깊은 곳으로 통한다는 전설도 전해왔다. 어릴 적 강진바다 선소와 쐬섬 사이의 용오름 현상을 봉천용왕바위의 용이 승천하는 것으로 믿으며 동네 어른들과 친구들이 몰려갔던 기억이 있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