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松 감 충 효시인/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
시인/칼럼니스트

읍성에 내걸었던 호롱불 깜박깜박
내일을 기약 못할 숨결처럼 희미한데
천고에 휘날린 시문 성벽에 걸치다

소재 이이명 선생의 큰 사상과 가르침과 그 당시 부분적인 세상 판도를 적은 봉천사 묘정비가 큰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난 2011년 12월 27일자로 봉강산 자락에서 남해유배문학관 야외공원에 옮겨졌다. 봉천사묘정비의 이전을 시작으로 매부(梅賦)의 연유문(緣由文)이 아닌 매부(梅賦)가 유배문학관에 소개되었다. 

유배객들이 읍성 주변에 호롱불처럼 내걸었던 시문들은 필자를 항상 읍성 주변을 서성거리게 했다. 어릴 적 어른들이 동문안, 동문밖, 서문안, 서문밖, 남문안, 남문밖, 북문 쪽에 위치한 봉양대, 생원골, 향교, 포교당 근처에 심부름을 시키시던 일들을 회억해본다. 

필자의 할머니께서는 제법 많은 수의 닭을 키우시며 모은 달걀을 시장에 팔고 필자에게는 맛있는 장터국수를 사주셨다. 어린 마음에 맛있는 장터국수를 먹을 수 있는 돈은 할머님께서 키우시는 닭이 낳은 달걀에서 나온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마치고 오면 들에 나가 닭이 좋아하는 벼메뚜기를 많이 잡아왔고, 봉천에서 멱 감고 놀며 가재도 많이 잡아 고무신짝에 담아왔던 일들이 생각난다. 

뿐만 아니라 할머니께서는 식구들 입맛 돋우게 하신다며 짚나래미에 꿴 향기 짙은 우렁쉥이를 사오시곤 했는데 오고 가는 길이 다름 아닌 동문안과 동문밖의 경계선이었다. 집의 축대나 담장에 쓰인 크나큰 돌들에 의문을 가지고 할머니께 여쭤보면 읍성 성벽이라고 설명해주셨다. 초등학교 시절 하굣길에 군청 뒤의 서변동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도 성벽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었다. 

2019년 8월에 고향 신문에서는 ‘남해읍 새 도시계획, 옛 읍성이 최대 변수다.’라는 제목의 대서특필 기사와 1915년 읍 지적도와 2019년 읍 지적도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필자는 신문에 보도된 지적도를 보며 그때 남해읍성의 동, 서, 남, 북문의 위치를 가늠해보고 내가 어릴 적 걸었던 길을 따라 가봤다. 그리고 인터넷을 뒤져 찾아본 것 중에 위의 사진은 1912년 남해읍성 동문 안에서 무당과 잽이(악공)들이 굿을 하는 장면으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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