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松 감 충 효​​​​​​​시인/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시인/칼럼니스트

세종의 아들 밀성군의 6대손인 이이명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역모를 꾸며 남해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모함으로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1722년에 노량진에서 사사 되었다. 이이명 선생의 적소이면서 서당 역할을 했던 습감재에서 충신효제(忠信孝悌)의 가르침을 받았던 남해와 인근 지방의 유생들은 이 소식을 듣고 부모를 잃은 듯 비통해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목호룡의 고변이 거짓으로 탄로되어 목호룡 등은 참수 후 당고개에 효수되었다. 그리고 노량진에는 당시 사화로 비명에 간 소재 이이명 선생을 비롯한 김창집, 이건명, 조태재의 사충신을 모신 사충서원이 세워졌는데 남해와 인근 지방의 유생들이 이곳의 영정을 모시고 와 습감재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봉천사를 지어 제사하며 뒤에 봉천사 묘정비를 세웠다.

봉천사 묘정비는 높이 260cm. 폭 83cm, 두께 32.5cm로 비문을 지은이는 문장에 능한 대제학 김조순이다. 그 후 봉천사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으로 보이며 봉천사 묘정비만 읍 공용터미널 맞은편 봉강산 자락에 있다가 남해 유배문학관으로 옮겨졌다. 그 습감재 서당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죽산마을 뒷산 당산에 매부를 짓게 된 매화 두 그루의 후손인 매화나무들이 크나큰 매원(梅園)을 이루어 이 고장의 자랑거리였고 남해중과 남해농고 학생들은 물론 인근 읍민들의 휴식공간이었다. 

이 매원의 향기는 창선 쪽에서 불어오는 동풍에 실려 봉강산, 봉영대, 생원골, 유림, 향교, 북변 시장통을 적시면서 읍성을 한 바퀴 돌다가 망운산 아래 옹기종기 남북으로 가로 놓인 아산, 봉전, 신기, 서변, 남산, 마산, 광포, 신촌, 내금, 외금, 야촌, 양지, 평현, 봉성을 거쳐 망운산을 거슬러 오른다. 그렇게 읍성을 향해 차오르던 매향은 해 저물 쯤에 다시 망운산에서 강진바다로 향해 부는 서풍으로 바뀌어 오동뱅이 마을 저녁 밥 짓는 연기를 싣고 읍성을 지나 남변, 죽산의 매원의 매향을 보태 담아 실은 뒤 죽산 앞뒤의 하마정들, 파천들을 잠재우고는 심천, 차산, 선소, 입현, 섬호, 토촌의 해조음까지 어깨동무하여 강진바다 건너 맞은편 창선도까지 그 매향을 흘려보냈다. 

어느 해 고향을 찾은 필자는 태어나서 자란 죽산마을의 뒷산 그 우람하던 매원의 추억을 찾아 마을을 둘러싼 대밭을 헤치고 가봤으나 그 전설적인 매원이 있던 곳은 대학 부속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매원을 둘러싸고 있었던 낙락장송들만 강진바다에 푸른 바람을 날리고 있었다.

우리 고향 남해는 그 옛날 명문거족 고관대작들이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를 많이 왔는데 서포 김만중, 소재 이이명, 자암 김구, 약천 남구만, 후송 유의양, 겸재 박성원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중에 서포 김만중과 자암 김구를 제외한 모든 유배객들이 이 곳 읍성 주변에 적소를 정하고 백성들과 교유했다. 또한 겸재 박성원은 250여 년 전 남해의 풍속이나 실상을 담은 300편이 넘는 한시를 그의 문집 광암집 ‘남해일기’에 남겼다. 박성원의 시에 유배생활을 하던 거처의 서쪽에 망운산이 있고 바다에 그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내용이 있으며 거처의 죽림에 대나무를 의인화 하여 지은 시가 많은 것을 보며 오랜 옛날부터 동네 주변에 대를 많이 심어 북풍을 막았던 죽산리(竹山里)에 그의 적소가 있었음을 추정해본다.

이 죽산리(竹山里)라는 지명은 여러 문헌에 많이 발견되는데 경상도 지리지에서는 남해읍성의 이전 과정에서 그 중심지로 적혀있기도 하다. 경상도 지리지 昆南郡條(곤남군조)에 기록된 읍성과 죽산리에 관한 내용은 다음에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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