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松 감 충 효시인/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
시인/칼럼니스트

죽산리(竹山里)라는 지명은 여러 문헌과 비문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경상도 지리지에서는 남해읍성의 이전 과정에서 그 중심지로 적혀있기도 하다. 즉, 경상도 지리지 곤남군조를 살펴보면 읍성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종 19년 남해를 복원하여 읍을 두었고, 세종 21년(1439) 화금현산성에서 죽산리(竹山里)로 읍성을 이전 축성하였는데 기존의 읍성이 비탈진 곳에 있어 옮겼다. 세종 21년(1439)에 읍성을 설치한 곳이 바로 군청이 위치한 곳이다. 읍성의 최초 제원은 문종 원년(1451) 「청경상충청각관성자척량계」라는 보고서를 정이오의 아들 충장공 정분이 성곽의 둘레 2,806척, 높이 12척, 해자 3,37척, 여장, 성문 3, 적대, 옹성 등을 상세히 보고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둘레가 2,876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세조 5년 성문을 하나 더 축성함으로써 70척이 늘어난 것이다. 

임진란이 지나 영조 정축년(1757) 남해현령이었던 조세술이 무너진 곳을 다시 견고하게 쌓았다. 일제강점기에 존재했었던 흔적을 조선전도를 통해 확인 가능하며 지적도에 남아 있다. 그러나 죽산리(竹山里) 일대 언막이 공사와 봉내천 범람에 따라 헐어서 사용되었고 큰 기단석은 활용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남아 있거나 건물 아래 묻혀 있다.》 <남해군지 상권, 2010년 발간. P.213>

세종 21년(1439)에 화금현산성에서 죽산리로 읍성을 이전 축성하였다는 내용과 읍성을 설치한 곳이 바로 군청이 위치한 곳이라는 상반된 내용이 기술상의 오류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던 그렇게 기록된 데는 다른 까닭이 있을 것이다. 경상도 지리지에 의하면 읍성의 돌들이 죽산리 일대 언막이 공사와 봉내천 범람에 따라 성을 헐어 사용하였고 큰 기단석은 부분적으로 남아 있거나 건물 아래 묻혀 있다는 기록을 그냥 기록으로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그 문화재적 가치를 떠올려 발굴을 시도해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항상 군민의 과제였고 관심사였는데 천우신조로 그 역사의 현장이 자연스럽게 전개된 사건이 생겨났다.  

유배문학의 산실인 이곳을 2008년 9월 초에 읍내의 시가지에 도로를 내다가 대규모의 남해읍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론이 분분하였다. 천우신조로 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이 읍성을 대대적으로 발굴하여 문화재적 읍성의 위상을 살려 관광지로 발돋움 해보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적어도 몇 백 년 전의 성이 발견됨은 문화재적 관점에서 엄청난 보물이 출토된 사건이었다. 문화재청에서 내려오고 관계기관의 자문을 받으면서 군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오랜 절차 끝에 도출된 결론은 도로 묻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의 문화재 향유능력의 빈곤과 발굴에 소요되는 엄청난 규모의 비용에 아예 손을 들어버린 것이다. 

필자는 그 당시 이러한 결말에 대해 통탄 수준의 글을 여러 지지(紙誌)에 발표하였고 필자의 시집에도 실었으며 읍성이야기와 유배문학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인 칼럼을 2019년 8월 8일부터 3년간 150회를 지방신문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성벽 주위에 보호재로 채우고 그 위치를 표시하여 훗날을 기약한다고 했지만 도로가 나서 아스콘이 깔려버리고 주변에 고층 건물이 들어서버리는 상황에서 발굴은 더 어려워질 것임이 분명하다. 지금이 기회다. 이유 불문하고 문화재는 살려야 한다. 읍성을 묻어버린 그 불명예를 씻을 때가 왔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함에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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