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조(彌助)리는 미아산 아래 있는 마을이라 이름 지었다고 하나 미아산은 없고 망운산(望山)이 있다. 나이든 사람들은 메지목, 메진목이라고 하며 본촌 또는 본말 이라고도 한다. 미조리는 그칠 미(彌) 도울 조(助)자를 쓰며 미륵불이 도와줄 마을이라고 설명을 한다. 어쩌면 왜구의 침입이 너무 많아 미륵의 도움을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남아있는 고유지명에서 알 수가 있듯이 목이 이어지지 않고 끝맺음한 곳이라는 뜻과 메다 메우다 메지내다와 연관된 지명이 메진목이다. 조선시대부터 관방을 지키는 군사 요충지로 첨사가 파견되어 다스리기도 하였으며 왜구의 침탈이 잦아 성을 쌓고 싸운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마을이다.
왕조실록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미조항은 세종14년(1432)에 방어시설이 없어 병선을 정박시켜 왜변을 막아야한다는 상소를 시작으로 진을 설치하는 문제를 두고 중종 13년(1518)까지 논쟁을 하였다. 그 후에도 왜선이 끊임없이 물과 식량을 구하려고 들어와 수군과 싸워 피해를 입었지만 남해현과는 60리 떨어져 있고 임시로 설치한 목책으로는 방비를 할 수가 없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중종17년(1522)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중종20년(1525)에 완성을 한다. 임진, 정유왜란 때에는 미조항의 수군과 첨사가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파도가 넘나들면서 모래가 쌓여 육지가 되고 사람들이 살게 된 사항(沙項)마을이 있다. 사항마을은 모래 사(沙) 목 항(項)자를 쓰며 파도에 밀려온 모래로 섬이 이어진 곳으로 모래목, 몰개너미, 몰개섬으로 불린다. 몰개는 모래의 사투리이며 섬 사이의 좁은 개를 가는 개 세포(細浦)라고 불렀다. 지금의 모래목은 연결이 되어 주택이 들어서면서 남쪽은 남항 북쪽은 북항이 되었다.
양풍(兩豊) 마을은 풍어와 풍년, 두 가지를 기원하는 의미로 두 량(兩)자와 풍년 풍(豊)자를 썼다고 하며, 마을 앞에는 섬의 형상이 새가 날아가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새 섬이라고 부르는 조도(鳥島)가 있다. 조도는 새 조(鳥) 섬 도(島)자를 쓰며 두 개의 섬이 연결되어 있으며, 주위에는 죽암도(竹巖島), 범섬(虎島), 모과섬(木瓜島), 쌀섬(米島), 노루섬(獐島), 북섬(鼓島), 뱀섬(蛇島), 쑥섬(艾島), 띠섬(茅島), 밤섬(栗島) 등 여러 무인도가 있고 북항 앞에는 누에처럼 생긴 미조도(彌助島)가 있다.
팔랑포(八良浦) 마을은 팔랑개라고하며 한때 식포(食浦)라고 불리었는데 이는 밥 식(食)자를 파자하면 팔(八)자와 양(良)자로 나누어 쓸 수가 있어 팔량개로 지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김삿갓이 친구의 집을 찾아가 남긴 파자 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친구의 부인이 “밥을 올릴까요(상식,上食)를 복일인양(卜一人良)할까요로 말하자, 남편의 대답이 친구가 가거든(붕출(朋出)을 월월산산(月月山山)하거 던으로 파자하였다는 것과 같은 놀이가 아닌가 생각을 한다. 팔량포는 여덟 팔(八) 물결 랑(浪)자를 쓴다. 대양과 마주하는 곳이라 파도가 치는 곳이며 파랑이 이는 곳으로 보는 것이 맞다. 거제의 파랑포(波浪浦), 팔랑포(八郞浦), 제주의 파랑포(波浪浦)에서 볼 수 있는 지명으로 파도를 의미하거나 여덟 사람으로 풀이를 하고 있다. 답하(沓下)마을은 팔랑개 서남쪽 사항마을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논아래 마을이라고도 한다. 한자로는 논 답(沓) 아래 하(下)를 쓰는 작은 포구 마을이다.
무민사는 미조리로 들어가는 초입의 왼쪽 언덕에 고려의 무장이었던 최영을 배향하는 사당이다. 일명 장군당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신상이 그려진 장군의 화상이 봉안된 것에서 유래한다. 무민사 기에는 고려팔도 도통사 무민 최공을 편히 모신 곳이요, 병마수군첨절제사 성공 윤문을 같이 모신 곳이다. 선조 때에 석공이 미조항에 부임하자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지성으로 부탁하므로 주위를 찾아보다 사항동에서 한 상자를 발견하였다.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최공의 초상과 검, 그리고 명문이 있었다. 그리하여 대나무집 수간을 만들어 봉안하였으며 장군당이라 일컬었다. 중간에 화를 입어 동파장에 영정을 모셔 두었다가 다시 화재로 인하여 이 땅에 모셨다. 지난 을미년에 군 인사 최공 경근이 물심으로 노력하여 사우를 창건하고 위패와 초상을 존봉하여 성공을 같이 모시고 사액을 무민이라하니 공의 시호를 취한 것이다.
송정(松亭)리의 옛날 이름은 송상마을이며 소나무 숲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 말엽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요소에 정자를 짓고 감시원을 배치하였는데 감시원이 머물던 정자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고려 때에는 소나무를 중요 자원으로 보고 왕명으로 나무심기를 권장하고 벌목을 금지시키는 것을 봉산이라고 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이 제도를 이어받아 능묘나 안태처 주변에는 금산제도를 시행하였으며 금산에는 감시초소를 설치하여 남벌을 막았다.
노구(蘆九)마을은 대지포에서 아홉등 아홉 골을 넘어오면 만나는 곳으로 물건리와 미조리를 연결하는 물미도로에서 가장 경관이 좋은 구역에 있는 마을이다 노구의 고유지명은 갈금 갈구미 놋구미이며 갈대가 많이 자라는 포구라는 뜻이다. 갈대 노(蘆) 아홉 구(九)자를 써서 갈대가 많은 아홉등 아홉 구비를 뜻한다고 하지만 구는 구미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며 구미는 기미나 금으로 변한 경우가 많이 있다.
가인포(加仁浦)는 개랑개, 개린개라고 하며 옛날 그곳을 지나가던 도사가 이름 지었다고 한다. 한자는 더할 가(加) 어질 인(仁)자를 쓰며 뜻으로 보면 어진 것을 더하는 마을이라 상당히 유교적인 냄새가 나는 지명이다. 하지만 한자의 음을 빌려 쓴 것으로 보면 가인은 가린이 되어 가린개로 가려진 개라는 의미이다. 어진 것을 더하는 것 보다 자연환경과 어울리는 가린개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마을 앞에는 말안장 모양의 마안도(馬鞍島)와 콩 모양을 닮은 콩섬(豆島)이 있다.
항도(項島)마을은 마을 앞에 있는 섬이 물이 들면 잠겨서 길이 끊어지고 물이 나면 길이 들어나는 목이 있어 목섬이라고 한다. 한자는 목 항(項) 섬 도(島)를 쓰며 앞바다에는 딴목섬과 팥섬이 있다.
송남(松南)마을은 마을 가운데 소나무 숲이 있어 부르는 지명이며 소나무 숲 위쪽을 송상(松上) 아래쪽을 송하(松下)로 불리며 한자는 소나무 송(松) 남녘 남(南)자를 쓴다.
초전리의 고유지명은 새밭금이다. 한자로 새 초(草), 밭 전(田)자를 쓰며 옛날에는 억새밭이었다. 바닷가에 방풍림이 있어 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설리(雪里)마을은 뒷산의 지형이 용이 서린 모습과 같다고 하여 서릴 반자를 써서 반룡촌( 盤龍村, 蟠龍村)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다른 설로는 서불이 떠난 곳이라 하여 서리곶(徐離串)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형적으로 볼 때 파도가 부딪히는 해안에 물안개가 서리어 있는 모습이 더 정감이 가는 지명이며 작은 설리라고 부르는 소설리가 있다. 지금 이곳에는 대규모의 콘도사업이 진행되고 있어 주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어지고 일부 사람들만 허용되는 곳으로 변하겠지만 군민들에게 혜택을 주는 시설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천하(川下)마을은 내 아래에 있는 마을로 내 천(川) 아래 하(下)자를 쓴다. 면의 경계에 있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쇳개와 내아래로 나눠져 있다가 통합하였으며, 쇠털미기(牛毛)라는 작은 뜸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