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천리는 마을 앞에 흐르는 내가 깊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깊을 심(深) 내 천(川)자를 쓰며 고유지명은 ‘지푼내’이다. 지푼내는 깊은 내의 방언이며 망운산에서 발원하여 오동뱅이를 거쳐 들 중간을 지나 바다로 흘러가는 내이지만 고지도나 지리지에는 표시되지 않고 지금은 동산천이라고 부른다. 영동군의 심천면, 경북 칠곡의 심천리도 같은 한자를 사용하며 주변에 강이 있어 ‘깊은 내’라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고현이나 설천 사람들이 읍내로 들어가려면 여산마을을 지나 후미진 골짜기에 새로 생긴 풍산 마을을 만난다. 이 마을을 지나 첫 번째 고개가 심천이 고개이며 고개를 넘어가면 작은 다리 큰 다리를 지나 새앵골 고개에 있는 현대마을에 도착하는 길이 예부터 있어온 남해대로의 중심축이다. 마을에는 구싯골 쪽징게, 쇠모가지와 아랫모, 웃모, 언덕모, 구석모, 안모 같은 고유 지명이 남아있다. 

구싯골은 진양 정씨의 재실이 있는 곳으로 골짜기 모양이 소의 먹이를 주는 구유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망운산에서 내려오는 동산천에 있는 큰다리, 강구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심천천에는 작은 다리(심천교, 소천교)가 있다. 옛날 큰 다리 밑에는 집 없는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살기도 하여 나쁜 소문에 가기를 기피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두 내는 동산마을에서 합류해 강진바다로 흐른다. 

아산리(牙山里)는 읍성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망운산 줄기에 솟아 있는 관대봉(冠帶峰, 가마봉, 시루봉)이 어금니를 닮았다고 하여 지은 지명이라는 설과 뒷산이 엄니처럼 솟아있어 지은 지명이라는 설이 있다. 또 관대봉은 옛날에 큰 비가 며칠을 두고 내려 천지가 모두 물에 잠기었는데 이 바위만큼은 잠기지 않고 가마 한 채를 놓을 만큼만 잠기지 않아 그 뒤로 가마봉이나 시루봉으로 부른다고 하지만 그냥 전해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은 오동(梧洞)마을, 봉전(鳳田)마을, 신기(新基)마을을 합한 법정리의 지명이 되었다. 아산리는 어금니 아(牙) 뫼 산(山)을 쓰며 고유지명은 ‘어금뫼’ 마을이다. 아산리에는 읍 주민의 용수를 해결하는 저수지가 2곳에 있다, 망운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은 물레방아를 돌리고 발전을 하기도 하였다. 

충남에 있는 아산시의 경우는 백제에서는 북부에 위치한 지역을 아술(牙述)현으로 불리었으며, 이는 어금니 수리(봉우리)라는 뜻으로 앞 음절은 훈차하고 뒤 음절은 음차하였다고 한다. 신라가 점령한 후에는 경덕왕의 지명 한화 정책으로 아술(牙述)현은 음봉(陰峯)현으로 개칭되었으며 이는 엄 봉우리의 음차로 추정을 한다. 고려 때 음봉현은 인주(仁州)현으로 개칭되어 오늘날 인주면으로 남았다. 조선 태종 때에 아주(牙州)현이 아산(牙山)현으로 개칭된 것이 지명의 유래이다. 엄니는 코끼리의 상아나 멧돼지의 엄니처럼 뾰족하게 계속 자라나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아산은 산세가 송곳니처럼 뾰족한 곳이 있어 계속 성장 발전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움과도 상통하는 말이라고 한다. 

오동리는 500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오동나무를 많이 심어 오동리가 되었으며 옛 지명은 오동방리였고 ‘오동뱅이’로 더 알려진 마을이다. 오동방리는 오동 오(梧) 마을 동(棟) 마을 방(坊) 마을 리(里)자를 쓰니 글자 그대로 오동나무 마을이다. 아산 마을 북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봉강산에 사는 봉황이 오동나무 열매를 좋아하여 이 골짜기로 날아들었다는 전설에 따라 이름 지었다고도 한다.

오동뱅이의 뱅이는 방의 사투리로 사용된 것으로 본다. 방은 방리(坊里)를 말하며 시골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말한다.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 다리 아래에는 넓고 깊은 웅덩이가 있어 옛날에는 뱃놀이도 하였다는 에구시라는 소가 있어 여자구시라고도 한다. 에구시는 한자로 두소(斗沼)로 쓴 것으로 보아 말구시로 본다, 구시는 구유의 남해 사투리다. 따라서 말구유를 닮은 덤벙이라는 뜻으로 생각을 한다. 충북 영동에도 에구시쏘라는 늪이 있다. 이 늪은 소구유를 닮아 지은 이름으로 못이 깊어 해마다 아이가 빠져 죽는다는 속설이 있는 둠벙이라고 한다. 못은 한자로 지(池)나 소(沼)로 표기를 하는데 지는 못의 형태가 둥근 것을 소는 굽은 것을 말한다. 

오동나무를 지명으로 쓰는 마을은 많다. 그 이유는 오동나무의 특성과 전설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오동나무는 가장 빨리 자라는 나무로 가볍고 연하여 가공하기 쉬우며 무늬가 곱고 뒤틀리지 않아 가구나 악기를 만드는 소재로 쓰인다. 옛날부터 딸을 낳으면 시집 갈 때 가지고 갈 장롱을 만들기 위해 심는 나무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기도 하고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였다. 장자의 추수 편에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를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예천의 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고 했으며, 신흠은 그의 야언 이라는 시에서 오동은 천년을 지나도 가락을 잃지 않고 매화는 일생을 추어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했으며 여러 시인 묵객들이 오동을 주제로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봉전마을의 옛 지명은 성대(城坮), 성뒤(성디)였으며 읍성의 뒤쪽에 있는 마을이다. 후에 마을 뒷산인 봉황산(鳳凰山, 봉강산)남쪽에 백로가 무리로 서식을 하면서 봉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봉전은 새 봉(鳳) 밭 전(田)자를 쓴다. 그대로 풀면 새밭이다. 다른 지역의 봉전마을도 봉황산 아래에 있는 마을 이거나 높은 산 아래 마을로 수리마을을 한자로 옮기면서 이름 지었다고 하는 유래도 있다.

신기마을은 새로 생긴 마을로 아래 ‘아산’이라고도 한다. 한자로 새 신(新) 터 기(基)자를 쓰며 새터모, 새탄모로 불리며 새로 터를 잡은 마을이다. 황토밭이 많아 불건덕(붉은 언덕)이라 부른 던 곳에 처음에는 하동에서 온 유 씨가 살았다. 후에 다른 성씨들이 이주를 해 오면서 동네를 이루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지명은 여러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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