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변리는 남해 읍성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북변리의 옛 지명은 성북리(城北里)였다. 성북리는 성 성(城) 북녘 북(北)자를 쓰므로 성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성뒤라고도 하였다. 후에 성북리는 북변리(北邊里)로 바뀌었으며 북녘 북(北) 갓 변(邊)자를 쓰며 북문외리(北門外里)라고도 불리었다.
유림리의 옛 지명은 교동리(校洞里)였다. 교동리는 학교 교(校) 마을 동(洞)자를 쓰니 조선 시대에 교육기관이었던 향교가 있는 마을 이다. 지금도 봉황산 남녘에 향교가 있으며 해마다 공자를 추모하는 제사를 지낸다. 후에 교동리는 유림동리(柳林洞里)로 바뀌었다. 유림리는 생원골 새앵골 이라 부르던 마을로 처음 읍성을 설치할 때 동, 서, 남쪽은 숲이 있으나 북쪽은 허술하다 하여 조림을 하였으며 그때 심은 나무가 버들이라서 버들 유(柳) 수풀 림(林)의 한자를 사용하여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선소로 가는 길 가에는 버드나무 고목이 줄을 지어 서 있었고 높은들 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유림동에 있는 향교 입구 삼거리에는 하마정이 있어 그런지 옛날에는 유림동 고개를 넘어 읍으로 들어오는데 텃새가 대단한 곳이었다. 유림마을의 뒤편에 있는 봉황산은 숲공원으로 조성이 되어있고 산자락에 있는 법흥사는 100년 전에 포교를 목적으로 읍내에 있었는데 지금장소로 이전하였으며 조계종에 속하는 사찰이다.
유림마을의 동쪽에 있는 봉강산 남서쪽에는 남해로 두 번 유배 온 소재 이이명을 기리는 봉천사 묘정비가 있었다. 이이명은 기사환국으로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장인인 서포 김만중이 남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숙종 18년(1692)에 남해로 이배되었다. 1721년(경종 원년)에 왕세자인 영조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다가 소론의 반대로 실패하게 되자 남해로 안치되었다. 유배된 이이명은 29년 전에 유배 왔던 집을 수리하여 향사들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의 학문을 가르쳤다.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이이명이 역모를 꾸며 남해에서 왕으로 추대 되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모함으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1722년 한강진에서 사사되었다. 이 사실을 안 남해향사들은 어버이를 잃은 듯 슬퍼하였다. 1800년(정조 24)에 남해의 향사들이 진주 사람들과 힘을 모아 이이명이 남해에서 머물던 습감재(習坎齋)의 옛터에서 2~3리 떨어진 곳에 사당을 지었고, 한양 노량진 사충당에 봉안하였던 영정을 가져와 모시고 봉천사라 하였다. 봉천사 묘정비는 김조순이 비문을 지었고 글은 김난순이 썼다. 묘정비는 사당이 만들어진 후 28년이 지난 1828년(순조 28)에 세워진 것이다. 이이명이 죽고 100여 년이 지난 후에 세워진 이 비는 봉천사 묘정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당은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고, 남해읍 북변리 430번지 야산에 있던 것을 남해유배 문학관으로 옮겼다.
현대 마을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며 남해읍의 입구에 자리 잡아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서변리는 읍성의 서쪽에 있는 마을로 서녘 서(西) 갓 변(邊)자를 쓰서 서변리로 부르며 서편리라고 한다. 서변리에는 읍내 여러 곳에 있던 비석들을 모아둔 비석거리(비석걸)가 있으며 이곳에 있는 비는 송덕비, 선정비, 공적비가 대부분이다. 서변리 삼거리를 효자문 거리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김 씨의 효성을 기리어 정려를 짓고 조정으로부터 영모문이라는 사액을 받은 효자 비각이 있다.
읍성의 남쪽에 있는 남산 마을은 남녘 남(南) 뫼 산(山)자를 쓴다. 남산의 정상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당이 있었지만 지금은 충혼탑이 서 있으며 공원과 공설 운동장으로 변신을 하였다. 읍의 서쪽에는 망운산 관대봉에서 내려오는 파천(巴川,뱀내)과 괴음산 너우개 앞으로 흐르는 봉천(鳳川,봉내)이 님산 앞에서 만나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여분내라 부르던 곳이 있었고 파천 들이 있었지만 간척 사업으로 사라졌다 여분내는 너분내의 음변으로 추정을 한다.
남변리는 읍성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성내 남변리(城內南邊里)라고 불리었으며, 죽산리는 대뫼 마을로 대 죽(竹) 뫼 산(山)자를 쓴다. 설천면 비란리에 있던 읍성을 지금 자리로 옮길 때 죽산리에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중심마을 이다. 죽산리는 주민이 늘어남에 따라 성의 남쪽마을을 남변리로 나누었다. 이 마을에는 평곡에서 내려오는 봉내 하류에 자구실 들이 있고 치인당이라 부르는 칠선당이 있어 동제를 지내던 마을이다.
회나무 거리에 있던 칠선당은 설천면 진목리에 있는 대국산성을 쌓은 천장군과 연관성이 있다는 전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칠 선녀는 북두칠성의 남신 칠 성랑과 여신 칠 선녀를 모시는 신앙으로 중국에서 도교와 함께 들어온 신앙이라고 한다.
남해 읍성을 죽산리로 옮기기 전에는 설천면 비란리와 고현면 성산리에 있었던 전야산군의 현성을 치소로 사용하였다. 고려 말 왜구의 침탈로 하동의 대야천 부곡으로 옮긴 뒤에 다시 돌아와 성을 보수하고 사용한 기록은 정이오의 남해읍성기에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읍성에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남해현 읍성(南海縣邑城)은 주위가 2806척, 높이가 12척이고, 여장(女墻)의 높이는 3척이며, 적대(敵臺)가 13개소, 문(門)이 3개소인데 옹성(擁城)이 있고, 여장이 553개, 성안에 샘이 3개소, 작은 도랑이 1개소 있고, 해자(海子)의 주위는 3037척입니다.
읍성 축조이전인 태종 15년(1515) 을미년 조에 남해 석성이라고 언급이 있다. 세종 14년 (1432) 목책을 설치하라고 하였다.
현 북쪽 고현리 화금현의 고현산성(古縣山城)에 둘레 1740척, 넓이 11척의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나 땅이 좁으며 기울어지고 위험하여(地窄傾危) 기미년(세종 21년, 1439년)에 죽산리(竹山里)로 옮겨 읍성이라 하고 둘레는 2826척, 높이 13척, 넓이 13척 4촌(寸) 돌로 쌓았으며, 군창(軍倉)이 있고 샘 1곳과 우물 5곳이 있다. 같은 해 남해 축성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5년. 南海石城保安 / 세종 즉위년. 上從之, 仍命待豐年設木柵 / 세종 21년 11월 20일(1439년) 築慶尙道 長鬐、迎日、南海、金海等
慶尙道續撰地理志 진주도(晉州道)남해편. 縣北古縣里火金峴山城壬子年石築周廻一千七百四十尺 高十尺廣十一尺地窄傾危己未年竹山里城移排石築周廻二千八百七十六尺高十三尺廣十三尺有軍倉井一泉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