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벽리(大碧里)의 고유지명은 벽재, 벽티로 불리었으며 1906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벽치동(碧峙洞)이었다. 마을 뒤에는 금오산과 상투산이 마주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두 갈래로 나뉘는 고개가 있다.
그곳의 지형이 두 산에 막혀 벽과 같다하여 벽 벽(壁)자를 써서 벽재라고 하였다는 설과 나무가 울창하여 사철 푸르다고 푸를 벽(碧)자를 쓰고 두 산 사이를 넘는 재(고개)가 있어 벽재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그 곳에 있는 큰 마을을 큰 벽재라고 하며 연태산과 대사산 사이 골짜기에 있는 안골 마을이다. 작은 마을은 작은 벽재라고 부르다가 한자음을 따서 소벽(小壁)으로 불리며 대사산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서촌골(徐村谷)은 벽재(대벽)마을의 윗마을을 말하며 서 씨 집성촌(集姓村)이다. 대벽 서쪽에 있는 후리막골(후리망골)은 마을앞 바다가 만(灣)으로 되어 수심이 깊지 않고 암초나 바위가 없어 후리어장 하기에 적합하여 어민들이 이곳에 막을 치고 후리어장을 하였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단항리(丹項里)의 고유지명은 단목이다. 마을 뒷산인 삼막산이 사천을 향하여 길게 누워 있는데 그 산의 모양새가 학이 날아가는 형상이며, 산 아래 마을이 학의 머리에 있는 붉은 댕기 모양이라 하여 붉을 단(丹)자를 쓰고 마을의 위치가 학의 목 부분이라 하여 단목 이라했다고 한다, 한자로는 붉을 단(丹) 목 항(項)자를 쓴다.
후인(厚仁)은 단항 서쪽에 있는 뜸으로 안 땀 이라고 부르며 후인(厚仁)마을은 후(厚)는 후박 (厚朴)을 뜻하는 말이고 인(仁)은 열매의 씨앗을 가리키는 것으로 후박나무의 씨앗을 한약명(漢藥名)으로 후인이라 한다, 마을 이름을 후인으로 함은 마을 당산나무로 수령 400년을 넘기는 거대한 왕후박나무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정한다.
단항마을에서 자라고 있는 왕후박나무는 나이가 4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9m, 가지는 밑동에서부터 11개로 갈라져 있다. 1982년 천연기념물 229호로 지정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 늙은 어부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잡은 큰 고기의 뱃속에 씨앗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상하게 여겨서 이 씨를 뿌렸더니 왕후박나무가 자랐다고 하며 동네사람들은 해마다 이 나무에 당제(堂祭)를 올리고 평안과 풍어를 빌고 있다. 또 마을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장군이 이 나무 밑에서 식사를 하고 쉬어갔다는 말도 전하고 있으나 기록은 없으며 주민들은 이 나무를 동제나무라 부른다. 후박나무는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 등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로 일본, 대만 및 중국 남쪽에도 분포하고 있다. 주로 해안을 따라 자라며 껍질과 열매는 약재로 쓰인다. 나무가 웅장하게 자라기 때문에 정원수, 공원수 등에 이용되고 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용으로도 심어졌다. 전라도의 부안, 진도, 경상도의 통영, 남해에 있는 후박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되어 관리하고 있다.
흑금동(黑金洞)은 흑검산의 땅 색깔이 검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고유지명은 검은기미, 거문지미라 한다. 원촌(院村)은 원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조선시대 관리들의 내왕이나 길손에게 숙식(宿食)을 제공하였으며 대개 나루터 근방에 원이 있었고 육지에는 규모가 큰 역이 운영되었다.
당항리(堂項里)의 우리말 지명은 당목이며 한자로는 집 당(堂) 목 항(項)자를 쓴다. 율도 마을을 경계한 고개를 당고개라 하는 것도 신당(神堂)이 있었기 때문이며, 신당은 규모가 커서 옛날 목관들의 회의장소를 쓴 큰 당집이 있었다고 한다. 당항마을은 윗마을 아랫마을로 나뉘어져 있는데 위쪽인 밤섬골 쪽을 웃몰, 윗마을이라 하고 벽재골 쪽 바닷가에 있는 마을은 아랫마을이라 한다.
냉천리(冷泉里)의 고유 지명은 찬 새미다. 원래 식수가 귀한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샘은 물맛이 좋으며 찬물이 많이 솟아 나온다 하여 지명이 찬새미가 되었고 한자로 찰 냉(冷) 샘 천(泉)써서 냉천(冷泉)리 라는 동명이 되었다. 또 다른 유래는 임진란 때 왜적을 치러 온 수병들이 샘물 맛이 시원하고 좋다 해서 찬 샘이라 한 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금오산성(金鰲山城)은 당항리 금오산(261m)에 위치한 테뫼식 산성으로 정상부가 말의 안장처럼 동서로 양분되어 있어 타원형으로 둘러싼 성이다. 둘레 2km, 폭 2m, 높이 3m 남,서편에 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현재는 허물어진 흔적만 남아 있다. 성벽의 축조 수법으로 보아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의 성으로 볼 수 있으며 주민들은 이 성을 십리산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급한 경사 때문에 산성으로의 출입이 어려운 상황이며 삼천포 방면으로의 바다를 조망하기는 매우 적합한 위치이다. 산의 낮은 골짜기를 막아 석축한 남문지 부분에는 연못이나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물은 배수로를 따라 나가게 되어 있다. 반대편의 소벽마을 방면으로는 성 밖에 석축된 건물지가 있었다고 한다. 성벽은 허물어져 상단부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성벽에 사용된 돌은 납작한 형태의 활석으로 크기는 길이 40~50cm, 높이 10~20cm정도이다. 이 성의 용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마성이나 왜구를 막는 진성으로 추정을 할 뿐이다. 전체 약2km 중 몇 년 전에 2~3백m를 복원하였으며 도 기념물 249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단항사거리-연태산-금오산성-속금산-국사당-대방산으로 이어지는 산행코스에 들어 있다.
창선, 삼천포대교(昌善·三千浦大橋)는 경상남도 사천시와 남해군을 연결하는 5개의 교량(삼천포대교, 초양대교, 늑도대교, 창선대교, 단항교)을 일컫는 이름이다. 늑도, 초양도, 모개도를 디딤돌 삼아 사천시 삼천포와 남해군 창선도 사이를 이어준다. 총 길이는 3.4km, 너비 14.5m로 1995년에 착공해 2003년에 개통되었으며, 2006년에는 대한민국 건설교통부가 발표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대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국도 제3호선 및 국도 제77호선의 일부이며, 가변차로제를 시행하고 있다. 다리마다 각각 다른 공법으로 시공되어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교량전시장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주변 한려수도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명품 대교로 인정을 받고 있다.
남해군 쪽에서는 창선대교 입구에 창선대교타운이라는 수협 활어 위판장, 레스토랑, 활어회 센터, 특산물 판매장, 자동차 극장 등의 시설을 완비해두고 있다. 사천시도 역시 삼천포대교 입구 인근에 삼천포대교 기념공원이라는 공원을 만들었다. 늑도와 초양도가 연륙도가 되면서 주민들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