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산리는 신라 때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으며 처음에는 윤산(輪山)이라 부르던 것을 차산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차산리는 수레 차(車) 뫼 산(山)자를 쓰며 윤산은 바퀴 륜(輪) 뫼 산(山)자를 쓴다. 후에 주민들이 늘어나서 마을이 커지자 가운데 위치한 마을을 가운데 중(中) 마을 촌(村)자를 써서 중촌(中村)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마을은 동녘 동(東)자와 뫼 산(山)자를 쓰서 동산(東山) 또는 고유지명인 동뫼라고도 한다. 산으로 막힌 골짜기 안에 있는 골안 마을은 골 곡(谷)자와 안 내(內)자를 쓰서 곡내(谷內)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세 마을은 보름날 합동으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차산리는 여러 곳에 있는데 남양주에 있는 차산리는 우마차로 필요한 석조물을 운반하다 수레너머가 마을 지명의 유래라 하고, 청도에 있는 차산리는 높은 수리산이 수레산으로 와전되어 지은 지명이라고 한다. 남해 차산리도 수레나 수레바퀴와 연관지은 지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이 남해 윤산에 있는 길상암에서「증편조동오의」를 저술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법륜(法輪)은 부처가 수레바퀴를 굴려 중생의 모든 번뇌를 굴복시키는 것을 비유하여 이른 말이라고 한다. 초기 불교의 교단에서도 부처의 설법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교법을 펴는 것을 전법륜, 즉 법륜을 굴린다는 의미이다.
선소리는 동쪽으로 강진만을 사이에 두고 창선도와 마주 보고 있는 포구 마을이다.「남해현 읍지」에는 선소는 현의 동쪽 5리에 있고 전선 대장 한 사람과 감관 두 사람이 있다고 적고 있고「조선지지」에는 읍내면 선소리에 선소포(선창)로 기록이 남아있다. 구렁뱅이, 몰랑, 언안들에 둘러싸인 곳으로 공기가 맑고 경치가 좋아 신선이 살았다고 하여 선소(仙所)라고 불러오다가 조선 시대 중앙관리가 배편으로 이곳을 지나다가 배가 많이 정박해 있다 하여 선소(船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스갯소리로 망운산에서 소가 내려오다가 바다를 만나 선 곳이라는 말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조선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조선왕조실록」에 “태종 17년(1417년) 의정부 육조(六曹) 공신(功臣) 총제(摠制) 대간(臺諫)에 명하여, 왜인(倭人)에게 재목(材木) 주는 것에 대한 가부를 회의(會議)하게 했다. 내용은 본국에서 왜선장(倭船匠) 등차랑(藤次郞)을 청하여 남해도(南海島)에서 배를 만들어 왔는데, 등차랑이 배 1척(隻)을 만들어 본도(本道)로 돌아가고자 하여 남아 있는 재목을 청하니,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예조 참판 허조(許稠)가 왜인은 성질이 사나워 믿기 어렵습니다. 항상 해도(海島)에 살면서 배를 만들어 횡행(橫行)함을 일삼고 있으니, 그 청을 한 번 들어주게 되면, 뒷날 진실로 막기 어렵습니다. 또 중국에서 이 일을 들으면 사교(私交)는 불가하다고 할 것입니다. 기타의 상사(賞賜)로 쌀이나 베[布]같은 것이라면 교결(交結)로서가 아니라 우리 변경(邊境)을 침략하기 때문에 부득이한 것입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기록으로 보면 선소리는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을 하며 한자 지명 역시 배 선(船), 곳 소(所)자를 쓰니 배가 있는 곳이거나 배를 만드는 곳이다. 전국에 분포하는 선소라는 지명은 여수, 부산, 영암, 진도 등 여러 곳에 남아있고 대부분이 배를 만들던 곳이다.
남해 선소왜성(船所倭城)은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에 축조된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쌓은 일본식 성곽이다. 1597년 11월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板安治)와 당시 순천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축성을 담당했다. 이후 소 요시토시가 수비장이 되어 일천여 명을 군사를 이끌고 약 1년간 주둔했던 곳이다. 지금은 왜성자리가 논과 밭으로 이용되고 있어 천수대와 내성은 남아 있는 석축으로 그 형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외성은 도로와 주택으로 인해 자취를 알아볼 수가 없다.
천남대(天南臺)라고 불리는 곳은 언덕 정상부에는 성곽을 세 겹으로 쌓아 올린 천수각(지휘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수각(天守閣)이란 일본의 전통적인 성 건축물에서 가장 크고 높은 누각을 가리킨다. 천수각은 성의 상징격인 건물로 취급된다. 성에서 제일 높게 솟은 구조물이다 보니 수성전 시 수뇌부가 주둔하면서 시야를 넓게 보고 전황을 파악, 지휘하기 용이하게 성의 중앙부에 높게 쌓아올린 곳이다.
선소마을 부둣가의 왼쪽 바다가 끝나는 부분에 커다란 둥근 바위가 있으며 바위에 가로 131cm 세로 253cm 크기의 직사각형 비석 모양으로 파서 글을 새긴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27호인 남해 장량상 동정마애비(南海 張良相 東征磨崖碑)가 있다. 당초문(唐草文)으로 띠를 돌려 새긴 비의 내용은 “천자께서 노하시어 오랑캐의 난을 평정하였다. 장사들이 분발하여 쉴 겨를조차 없이 긴 창 휘두르며 센 화살을 쏘았다. 갑옷이 찬란하고 별과 달도 빛났으며 큰 바다를 박차니 파도도 숨을 죽이고 장검을 휘두르니 천하가 모두 선경이로다. 천제의 신하가 사냥을 나가니 모든 금수들이 굴복하니 황령이 떨치심이요, 불의를 치니 모든 악의 무리가 조용해지고 갑옷을 떨쳐입고 나서니 모든 무리가 굴복하여 따랐다. 큰 고래를 봉쇄하니 작은 고기들이 맥을 추기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뜨니 온 천하에 영향이 미치도다. 이 위대한 공적을 큰 비에 새겨 기리 후세에 남겨 두니 먼 나라에 이르시는 고마운 어른으로 받들어 모시리라”이다.
선소마을 입구에 있는 팽나무 아래에는 축항기념비(築港紀念碑)가 있다, 축항기념비는 1926년 착공하여 1929년 완공한 선소마을 축항을 기념하는 비로 1932년에 세웠다. 주요 내용은 “선소는 지형이 적절하지 못하여 굽고 수심이 천박하며 배를 대는 곳이 좁아 겨우 몇 척의 배를 비뚤어지게 댈 수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만조 때는 물이 넘치고 간조 때는 배가 빠지기 일쑤라 사람들이 탄식하며 천재의 기회를 갈망하였다”고 돼 있다. 축항(築港)은 항구를 건축한다는 뜻이지만 어릴적에는 자체가 고유명사가 되어 선창을 축항이라고 불렀다.
마을 중앙의 바닷가에는 전선대장이 주거하였던 곳으로 추정하며, 여러 가지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은 창고터, 창터라 불리고 있다. 말에게 물을 먹인 구름뱅이가 있고, 중촌의 남쪽 개는 굴강으로 불리며, 선소의 동쪽 바닷가는 상산개(성산개) 해수욕장이 있다.「읍지」에는 “현 동 오리에 차산포가 있고 염전이 있으며 왜인이 쌓은 성터가 있다”고 적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