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동대리(東大里)의 옛 이름은 동한재이다. 서쪽 산 너머 서대마을과 연결되는 큰 고개를 한재라고 하며 한은 대(大)의 우리말이다. 한재의 동쪽에 있어 동한재가 되었으며 한자로 표기하여 동대(東大)가 되었다, 고개 아래 골자기 일대를 한재골 또는 한재마을이라한다

곤유리(昆遊里)는 당항과 곤유마을 아래에 있는 개에 계절이 바뀌어도 옮겨 가지 않고 사는 새가 있었는데 새의 이름이 곤니라고 해서 지명이 되었으며 점차 변하여 곤유가 되었다고 한다. 고유지명은 고내개, 고니개, 괘개라고 한다. 한자 지명은 처음에는 고니 곤(鵾) 놀 유(遊)자를 사용하다 맏이 곤(昆)자로 바뀌었으며, 원래는 동대리였으나 분동 하면서(1949) 곤유리가 되었다. 

고니새(鵾)는 겨울 철새로 옛날 사람들은 천아(天鵝)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늘 새라 하여 신성시하였고 민간 신앙에서는 첫 무리가 많이 날아오면 풍년이 들고 적게 날아오면 흉년이 든다는 속설을 믿는 사랑받는 새였다. 해마다 겨울이면 떼를 지어 날아와서 장관을 이루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개울이 얼지 않고 먹이도 귀해져 점차 줄어 들더니 80년대에 이르러 종적이 끊어 졌다고 한다. 고니는 기러기목 오리과에 속하는 조류로 지금은 멸종위기 야생동물로 천연기념물 제201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신촌(新村)마을은 선창이 새로 개설됨에 따라 사람들이 불어나 새 마을이 형성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새 신(新) 마을 촌(村)자를 쓰며 동대리 북쪽에 있는 마을을 이르는 지명이다.

상신리(上新里)는 오래전부터 모산동(茅山洞)이 상, 하 양동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연지동(蓮池洞)도 상지동(上池洞)과 하지동(下池洞)으로 나누어져 4개의 마을이 한 개동으로 형성된 곳이다. 진주목지(晉州牧誌)에는 지산동(池山洞)으로 표기 되어 있다. 이는 상지와 모산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 하지만 지(池)와 산(山)은 어울리지 않는다하여 1906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지동의 상과 신기동(모산)의 신을 따서 이름을 상신리(上新里)로 하였다고 한다. 

상지동(上池洞)은 옛날에 상신 남쪽에 있는 독뫼 아래쪽에 못(池)이 있었는데 형상이 풍수지리설로 연화부수격(蓮花浮水格)이라하여 연지동(蓮池洞)이라고 했다가 훗날 2개동으로 나뉘어 윗마을을 상지동(上池洞). 아랫마을을 하지동(下池洞)이 되었다고 한다. 한자로는 위 상(上) 못 지(池)자를 쓴다.

모산동(茅山洞)은 띠풀이 많다고 하여 지은 지명으로 당연히 띠 모(茅)자와 뫼 산(山)자를 쓴다. 길을 사이에 두고 상, 하 양 동으로 나눠 있었으나 마을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통합되었다, 고유 지명은 모산골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일대가 띠풀이 무성한 산골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동(下池洞)은 하지(下池)라는 이름 보다 통새미 라는 이름이 더 알려져 있다. 마을 안에 맑고 차기로 소문난 우물이 있어 지은 이름이다. 이 공동우물의 우물 통을 큰 느티나무로 만들어 땅속에 박아 지상 1m 까지 샘물이 솟아나와 통새미로 유명했다, 원래의 나무통은 오랜 세월로 파손되어 시멘트로 바뀌었지만 여전이 지상으로 넘쳐 나왔다. 하지만 인근의 지하수개발로 용출량은 줄어들었고 주민들의 상수도 이용으로 폐정(廢井)에 이르렀다, 

우믈에는 2가지가 있다. 구덩이를 파서 지하수를 퍼 올리는 것을 우믈이라하고 한자로 우물 정(井)자를 쓰고, 지표면으로 솟아나오는 것을 샘이라하여 샘 천(泉)자로 표기하였다.

부테날은 앞 바다가 깊숙이 둥글게 들어와서 나루터가 되었고 지형이 아낙네들이 베틀에 앉아 허리에 차는 부테와 같아 부테나루가 되었다, 지명은 후에 부텟날 부틋날 부뜻날로 변하였고 앞들은 선창들로 아직도 불리어지고 있다. 곤유리 신촌의 동대 선창을 새 선창이라고 하는 것도 이에 기인하는 지명이라고 한다. 

걸문개는 동대리 안쪽으로 들어온 바다를 이르는 지명으로 지금은 동대리의 앞 바다라고 해서 동대만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걸문개가 안으로 들어와 있어 창선도와 흥선도의 두 개의 섬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고유지명인 걸망개를 버리고 동대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은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다. 

걸망개는 걸망처럼 생긴 개를 일컫는 말이다. 걸망은 우마(牛馬) 가 먹는 꼴을 담던 망태를 이르는 말로 입구 주둥이가 좁고 아래가 넓은 모양을 하고 있어 꼴망태나 걸맹이로 익숙한 말이다. 따라서 걸망개는 이를 차용한 지명으로 남해안 여러 곳에 같은 지명이 남아 있다. 또 조락개는 걸망개의 다른 이름인데 이는 조락이 어패류를 담는 도구로 걸망과 같은 모양을 가졌기 때문이다. 조라포란 지명을 살펴보면 거제도의 구조라는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으로 이곳은 조선조에 조라포 만호진이 있던 해안선의 지형이 복조리 모양이어서 조래개라고 부르던 것을 조라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통영의 대방포, 당포성지, 신봉과 창선에 걸망개가 있었다. 일부는 간척 사업으로 없어진 곳도 있고 그 이름을 계승하는 곳도 있지만 창선의 경우는 동대만으로 바꿔 사용하고 있으며, 동대만 매립지에는 생태공원, 체육공원, 간이역, 승마 랜드, 파크골프장 등이 설치되어 있고 갯벌체험장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걸망개 기록을 보면 세종13년(1431) 경상도 감사가 아뢰기를, 흥선도(興善島) 동편 바깥쪽 걸망포(乬亡浦,巨乙亡浦) 바깥쪽 장곶(長串)에는 백성들의 거주 및 경작을 금하고, 걸망포 안쪽의 전토는 인민들을 내면으로 옮겨 살도록 하여, 적량(赤梁) 근처에 별망을 두어 수호하고 내왕하면서 경작하게 해달라는 요구와 남해도(南海島) 동편 바깥쪽 난포(蘭浦)와 남편의 바깥쪽 가화포(加火浦) 고을포(古乙浦)에 사는 백성들이 경작하는 전토를 평산 만호에게 수호하게 하여 내왕하면서 경작하게 하고, 그 우현(牛峴) 바깥쪽 대양(大洋) 가[邊]의 전토는 백성들이 개간하여 경작함을 금했다는 기록이다.

선조 30년(1597)에 한산에 머물러 있던 군민(軍民), 남녀·군기(軍器)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雜船)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昌善島)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格軍)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 고 하였다는 기록과 이순신 행록에서 초4일 당포로 나아가 원균의 소재를 찾게 했는데 작은 배 한척으로 창신도에 있었다는 내용도 걸망포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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