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선도(彰善島)는 남해군에 있는 섬으로 우리나라에서 아홉 번째로 큰 섬이다. 면적은 54㎢이고, 해안선 길이는 107㎞이며 동서 간 길이는 11.5㎞이고, 남북 간 길이는 10.5㎞이다. 1980년에 창선교를 통해 남해도와 연결되었으며, 2003년에는 창선-삼천포대교를 통해 사천시와 연결되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만입한 동대만(東大灣)이 섬을 동서로 거의 이등분하며, 서쪽이 동쪽보다 약간 길고 크다. 서부는 동부보다 험준하며 산지가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 있다. 서남부 중앙에 대방산(臺芳山, 468m)이 있고 동부는 망치산(望峙山, 268m)이 제일 높다. 암석해안이 대부분이고 해안선이 복잡하나 수심은 얕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창선도의 역사적 기록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창선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부곡, 목장지, 월경지, 직촌, 임내 등의 용어를 알아야 한다. 먼저 고려사에 기록된 창선도(彰善島)는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유질부곡(有疾部曲)이다. 고려에 와서 지금 이름으로 바꾸고 승격시켜 현(縣)이 되어 진주에 소속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자 왕의 이름을 피하여 흥선(興善)으로 고쳤다. 뒤에 왜구가 침략하자 주민들이 모두 도망가서, 직촌(直村)이 되었다.
먼저 고구려에 있었던 유질부곡은 마을의 성격은 알 수가 없다, 부곡(部曲)은 고려 및 조선 초기에 있었던 특수 계층의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방 행정 단위이다. 읍사(邑司)와 장리(長吏)가 있었으나 일반 군현(郡縣)과 구분되어 운영되었다. 주민의 신분에 대해서는 양인설(良人說)과 천인설(賤人說)이 있으며, 고려후기부터 폐지되거나 군현으로 승격하면서 점차 소멸하였다.
부곡(部曲)은 본래 중국에서 호족세력 등에 예속되어 있는 사천민(私賤民)으로서 그 자체가 특정한 신분층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군현에 준하는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주민은 부곡인(部曲人)이라 하였다. 부곡의 주민은 농업 생산에 종사한다는 점에서 일반 군현 민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창선도는 진주에 소속되었지만 경계에 접해 있지 않고 떨어져있는 월경지였다. 월경지(越境地)는 경계 너머의 땅이라는 뜻으로 월입지(越入地), 비입지(飛入地), 비월지(飛越地), 비지(飛地)라고도 한다. 월경지는 일찍이 후삼국시대부터 자료에 그 존재가 확인된다. 조선시대에는 행정구역에서 소속 군현의 관할구역에서 떨어져서 다른 군현 사이에 있는 땅을 뜻하는 용어였다. 각종 산물의 자급자족이나, 속현이나 향, 부곡, 소를 독립시키거나 주현의 일부로 합병하는 과정에서 월경지나 땅거스러미가 설정되는 일이 많았다.
조선시대의 월경지는 상당수가 고려시대로부터 기원한 곳들이다. 조선 후기까지도 전국 각지에 100여 곳 이상 존재하던 월경지는 광무 10년(1906) 지방 행정구역 개편을 통하여 대부분 소멸되었으나, 일부 월경지는 1914년 일제의 지방 행정구역 개편 때에 통폐합을 거쳐 조정되었다.
속현(屬縣)은 고려와 조선시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지방행정구역으로 속부(屬府) 속읍(屬邑) 속현(屬縣)의 총칭으로, 관내(管內) 임내(任內) 겸현(兼縣) 합속현(合屬縣) 부읍(附邑) 지현(支縣) 등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主縣)과 구별되며, 행정체계상으로는 주현을 통해 중앙정부의 간접통치를 받았다. 발생 원인은 고려가 기존의 지방 호족들 사이의 세력관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대호족의 세력권을 주현으로, 그에 복속해 있던 중소 호족의 세력권을 속현으로 각각 개편하였다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속현의 관계는 단순히 행정적인 것이 아니라 호족간의 신분적 위계를 반영하는 것이며, 이와 같이 군현제의 편성이 신분적 질서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고려 군현제의 특징으로 설명된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전기에 주현이 130이었는데 비해 속현은 374로 훨씬 많은 수를 차지하였다. 예종1년(1106)부터 속현에 감무(監務)를 파견해 주현으로 승격시키는 등 속현을 줄이기 위한 정책을 꾸준히 실시하였다. 그 결과 고려 말에 이르면 전국의 174군현에 감무가 파견되고, 속현도 약 160 정도로 감소하였다. 여러 속현을 합해 하나의 주현으로 개편하거나 속현을 주현의 직촌(直村)으로 만드는 방법 등이 사용되었다. 15세기 후반기에 이르면 72속현만이 남게 되었으며, 이것도 점차 주현으로 승격되거나 면(面)으로 개편되어 17세기경에는 모두 소멸하였다.
남해에는 금산장과 동천곶 목장 그리고 진주에 속한 창선 목장이 있었다. 목장은 삼국 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 시대에는 태복시(太僕寺)를 설치하고 국영목장을 관리하였다. 이를 이어 조선 태조 때에는 전관목장(箭串牧場)이 세워졌고, 조선 세조 때에는 강원도 일대에 목장이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전까지 전국에 159개의 국립목장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 점차로 목장은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효종 때의 북벌정책을 계기로 잠시 활성화되었다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제에 의해 대부분 폐장되었다.
흥선도 목장의 정확한 설치 연도는 알 수가 없으나 세종13년(1431) 경상도와 전라도에 물과 풀이 풍족한 곳을 찾아 목장을 만들라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후로 추정을 한다. 창선과 가까운 고성의 해평곶이 목장도 세종21년(1439)에 설치되었다. 그 후에 세조3년(1457)에 흥선도 목장을 점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역사서에 기록으로 남아있는 자료를 정리해보면, 고구려 유질부곡 / 고려 현종9년(1018) 창선(彰善)현으로 승격 진주임내에 소속 / 원종10년(1269) 국사를 진도로 옮김 / 충선원년(1308) 왕의 이름을 피하여 흥선(興善)현으로 개칭 / 왜구의 침입으로 주민들이 피난 직촌이 됨 / 태종13년(1413) 창선(昌善)현으로 복귀 / 세종19년(1439)흥선현을 강등 시켜 흥선도를 직촌으로. / 성종2년(1470) 창선도리 / 선조37년(1604) 삼천포 말문리에 병합 / 광해14년(1622) 창선리를 부활 / 영조41년(1765) 창선리와 적량리로 분리 / 광무10년(1906) 진주 남면에서 남해군으로 이속 창선면. 16개 리.
창선도는 이름이 바뀌는 과정에서 창선과 흥선을 다른 섬으로 기록한 지도가 있고 실록에도 ‘중종38년(1543) 진주(晉州)의 창선(昌善)과 흥선(興善) 두 섬은 서로 잇닿아서 목마(牧馬)가 왕래하며 살기 때문에 가장 긴요한 목장(牧場)이어서 백성에게 갈아 먹도록 허가할 수 없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창선면에서는 근세에도 도세저항운동을 주도 하는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순탄하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