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리(玉川里)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골이 깊고 물이 많은 곳이다. 고유지명은 막은 골이라 하며 지명의 유래는 골이 마흔 개라서 마흔 골이라는 설과 목장의 관리를 위해 토성을 쌓아 막은 골이라는 설 등이 있지만 토성(土城)을 쌓아 골을 막았다 하여 막은 골이 마흔 골로 된 것으로 보인다, 경상도 지리지(地理志)와 진주목지(晉州牧誌)에는 막은동(莫隱洞)으로 남아있는 오래된 지명이다. 1906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맑은 시냇물을 상징하는 옥천으로 바꾸었으며, 옥천리는 옥 옥(玉) 내 천(川)자를 쓴다. 옥구슬 같은 맑은 냇물이 흐르는 골이라는 뜻으로 지은 지명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2년(1420) 경상도 관찰사 장계에 거제, 남해, 창선의 3개 섬에 개간한 토지가 모두 1,130여결인데 부근에 있는 각 고을 인민들이 몰래 들어가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 많다. 만일 왜구의 변을 만나게 되면 약탈이 두려우니 금후에는 들어가서 농사 짓지 못하게 하소서, 라 하니 3개 섬 가운데서 전지가 많은 곳에 목책(木柵)을 만들거나 혹은 토성(土城)을 쌓고 백성이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서 농사를 짓게 하며, 낮에는 망을 보아 변고에 대응하고, 밤에는 성에 들어가서 굳게 지키며, 또 부근 각 진의 병선으로 하여금 그들을 수호하게하고 전지가 적은 곳에는 농사짓는 것을 금지케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옥천리에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있는 옥천저수지는 일제강점기인 1944년에 준공하였으며 후에 여러 차례 확장을 거쳐 지금과 같은 규모를 갖게 된 것은 65년도 이후라고 한다, 동대만(東大灣)매립지와 오룡매립지의 혜택면적을 계산하여 둑 높이28m 길이 229m 저수량 60만t을 자랑하는 오늘의 저수지가 되었다.
옥천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어서 막은 골, 갈골, 불당골, 서당골, 오리방골, 장골, 절골, 큰골, 허망골, 호망골, 홍골 등과 같은 골이 많다. 갈곡 끝에는 용마전설이 전해오는 고동비렁이 있다. 전설의 내용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많은 전과를 올린 김덕령 장군이 진주진에 있었다. 그때 창선 목장에 키우던 말 가운데 용마가 있는데 다룰 수 있는 자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김 장군이 와서 용마바위에 있던 말을 잡아타고 내려왔으며 그때 남은 발자국이 바위에 남아있다고 한다. 후에 김 장군이 무고로 옥에 갇혀 풀려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자 용마도 굶어죽었다고 하는 슬픈 이야기다. 장군을 모신 사당은 광주광역시에 있는 충장사이다.
노촌(盧村)은 옥천저수지 제방 이래 서쪽에 있는 마을로 노 씨 집성촌으로 마을 앞들을 노촌들 이라 한다, 정촌(鄭村)은 토성마을에서 옥천저수지로 가는 중간 노촌의 옥천천 건너 마을로 정씨들이 주로 많이 산다하여 정촌이라 한다, 탁촌골(卓村谷)은 큰 골에 사는 사람들이 탁 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어 탁 씨 촌이라고 하는데 그냥 탁 촌이라고 부르는 작은 마을이다,
대방산(臺方山)은 창선의 주산으로 해발 468m 주봉인 벼락재와 봉수대(烽燧臺)가 있다. 한자 지명은 돈대 대(臺) 모 방(方)을 쓰며 사방을 살필 수 있게 높이 쌓은 대와 같은 산이라는 의미이다. 대방산에는 봉수가 있었으며 남으로 남해 금산(錦山)에 응(應)하고 북으로 사천 각산(角山)에 응하던 곳으로 양쪽 모두 육안으로 확인되는 거리이다. 2003년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248호로 지정되었다.
봉수대에는 봉수군이 교대 근무하며 상주할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으며 부근에는 흩어져 있는 조개껍질도 확인 할 수 있다. 대방산 봉수대는 고려 명종(1171~1197)때 설치한 것으로 추정하며 조선시대까지 사용하다 1895년 각 처의 봉수대와 봉수군을 없애라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대방산 봉수대 역시 이 때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봉수대의 원형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곳이 봉수대 자리였음을 알려주는 지름 13m, 높이 3m의 석축과 연대로 추정되는 곳이 있어 2000년도에 복원을 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방산봉수(臺方山烽燧)가 현의 남쪽 백십 사리에 있다. 여지도서에도 진주에서 남으로 110리에 대방산봉수가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고지도에는 대방산을 坮芳山, 臺方山峰, 對芳山烽으로 표기하고 있다.
봉화는 고려 때부터 군사 통신수단으로 연기를 올려 그 곳의 상황을 전국의 봉화망(烽火網)으로 묶어 연락을 하였다. 밤에는 봉화를 올렸고 낮에는 연기를 피어 올렸다, 평상시애는 한개(1炬)를 올리고, 적이 나타나면 두개(2炬), 접경에 이르면 세 개(3炬), 국경을 침범하면 네 개(4炬), 접전에 이르면 다섯 개(5炬)를 올렸다, 봉화를 제 시간에 못 올리거나 다른 시간에 봉화를 올리면 변이 있는 것으로 추측 되어 관리가 엄격하였으며,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릴 경우에는 병사가 직접 전달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운대암(雲臺庵)은 고려 초에 창건한 망경암이 오랜 기간 비어 있다가 임란(壬辰亂)이후 세월선사(洗月)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운대암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정사(丁巳)년 홍수 때에 문화재와 함께 유실되어 부도(浮屠)만 남아있는 것을 정삼화상(井三)이 중창 하였다. 1990년에 산신각(山神閣)과 본당을 삼창(三創)하였으며, 2005년 서광(徐光)큰스님이 목조건물을 지어 전통사찰의 면모(面貌)를 갖추었다. 범종루에 오르면 돌계단 위로 청기와를 얹은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서있고 운대암 아래에는 적곡지가 있어 멋을 더하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망경암터(望景庵趾)는 수리절터라 불리는 곳으로 봉수대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려 구녕바위와 칠성암 등이 총석(叢石)으로 이루어진 등성이 부분이 망경암(望景庵)의 옛터라고 하며, 칠성암(七星岩)과 좌선대(坐禪臺)는 바위가 평평하여 지은 이름이다.
광천리(廣川里)는 대방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어 내려간 골짜기가 넓고 크다 하여 지은 지명으로 고유 지명은 넓은 내, 너린내, 너른 내라고 부른다. 한자로는 넓을 광(廣) 내 천(川)자를 쓴다. 사포 쪽으로 가는 고개를 광성현(廣城峴)이라 불렀으며 마을사람들은 광싱이 재(강신이 재)로 통한다. 광싱이 끝은 광싱이 고개 아래 바닷가 돌출부를 말하며, 끝은 일반적으로 곶(串)에 못 미치는 지형을 이르는 말이다.
사포리(沙浦里)는 마을 앞 해변에 모래가 많아 지은 이름으로 고유 지명은 모래개, 모락개라고 한다, 한자로는 모래 사(沙) 개 포(浦)자를 쓴다. 지금은 바닷가는 매립되어 대지나 도로로 변하여 모래개의 이름만 남아있는 마을로 광천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