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상주(商州)리는 미조항과 더불어 군사 요충지로 지형이 상(尙)자를 닮아 이름 지었다거나 신라 때 원효대사가 보리암에 머물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어디냐고 묻는 질문에 산하상주(山下常住)라고 대답 하였는데 상주(常住)가 뒤에 상주(尙州)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작은 마을 이름에 고을 주(州)자를 쓰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욕심 없이 산 아래 내가 사는 곳이 좋다는 지명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상주는 오히려 상(尙) 고을 주(州)자를 쓴다. 삼한 시대부터 중요한 지역이었던 경북 상주와 같은 지명이다 경북의 상주는 사벌국, 사불국이었으며 신라 때까지 같은 지명을 사용하다 上州, 尙州로 지명을 바꿨다. 상(尙)자는 더하다 숭상하다, 높이다 등의 뜻을 가진 글자로 숭상할 만큼 좋은 마을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조선시대 상주에 대한 기록을 보면 연산군3년(1497) 상주포에 목책을 설치하였다는 기록과 중종39년(1544) 미조항 첨사가 상주포를 통속하였으며 선조32년(1599) 수하에 병사도 없이 직인만 가지고 영에 기탁하면서 군민에 폐단을 끼친다는 보고에 따라 영조27년(1751) 상주포를 혁파하고 금산 망봉으로 적의 침입에 대비 하게 하였다. 

상주에는 옛 성지와 은모래비치라 불리는 해수욕장이 있다. 해안을 따라 송림이 있고 마을 뒤에는 소금강이라 불리며 38경을 자랑하는 681m의 금산이 있다. 금산에는 우리나라 3대 관음 기도처인 보리암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한려해상공원의 명소가 되었다. 금산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이 산을 찾아와 백일기도를 올린 뒤에 조선왕조를 세우고 태조가 되었다. 이성계는 뜻을 이루게 되면 산을 비단으로 덮겠다고 산신령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왕이 된 후에 보광산 이었던 산 이름을 비단 금자로 바꾸어 금산으로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금전(錦田)마을은 비단 금(錦) 밭 전(田)자를 쓰니 금산 아래에 있는 밭이 많은 마을이며 금양(錦陽)마을은 금산 아래 양지 편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후에 생긴 마을 들이다. 임촌(林村)마을은 수풀 임(林) 마을 촌(村)을 쓰며 당연히 숲에 있는 마을로 숲 마을, 숲페라고 불린다. 

금포(金浦)마을은 쇠 금(金) 개 포(浦)자를 쓰며 우리말 지명은 쇳개마을이다. 상주를 넘어 송정 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 바닷가에 쇳가루가 섞인 검은 색의 모래가 많아 지은 지명이다.

양아(良阿)리는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경기도 임진강가의 양아리에 살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와 살면서 지명을 그대로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지명 유래는 여수에서 오는 물과 앵강만의 물이 두 갈래로 흐르는 곳이라서 양아리로 하였다는 것이다. 양아리는 어질 양(良) 언덕 아(阿)자를 쓰며 글자 그대로 좋은 언덕 마을이라는 뜻이지만 마을의 실상은 경치는 좋지만 비탈진 기슭이라 사람이 살기에는 어려운 마을이다.

옛 지리지에는 임진강가의 양아마을 지명은 없지만 연산군 8년(1502)에 함경도의 양아리(楊阿里)에 사는 박 씨가 죄를 지었지만 그 할아비와 아비가 조종(祖宗) 때로부터 의(義)를 사모하여 투항해 왔기 때문에 그 자손은 우리의 백성이 되어 군역(軍役)에 복무했는데, 지금 도망간 까닭은 오로지 변장(邊將)이 그들을 어루만져 통어(通御)하는 일을 근실하게 하지 않았으므로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사무쳐서 유랑(流浪)하는 데 이르게 된 것이다. 이에 특별히 죄를 사면하여 남쪽의 살기 좋은 곳에 온 가족을 옮겨 살도록 하고, 수령(守令)들에게 명하여 논밭을 주어 무마하고 그들로 하여금 직업에 안심하고 종사하게 하라는 기록은 있지만 알 수는 없다.

양아리에는 작은 마을은 소량(小良),소양이라 하고 큰 마을은 대량(大良), 대양이라 한다. 고전에는 良자와 梁자는 같이 쓰는 경우가 많아 대량은 크게 나온 곳, 소량은 작게 나온 곳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다.

두모(豆毛)리는 옛날 이곳을 지나던 도사가 마을을 두모라고 부르면 번창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지었다고 하며 두모(杜無)는 막힘이 없는 마을이라고 한다. 두모리는 읍지에는 두모포리로 기록이 남아있으며 두모포는 현동 20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지명의 한자표기는 콩 두(豆) 털 모(毛) 개 포(浦)자를 쓰지만 한자의 음을 빌려 쓴 것이지 뜻을 빌려 쓴 지명은 아니다.

두모는 고구려 때부터 내려오는 지명의 하나로 토문, 두만, 도마, 두모, 두무, 두메산골, 드무 등으로 널리 쓰였으며 지명 학자 남명우는 동양의 풍수지리에서 부자나 권력가가 나오는 명당자리로 배산임수를 말하는 지형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두모는 입이 큰 항아리를 드므(궁궐이나 큰 건물에 비치하여 방화용으로 사용한 항아리)에서 유래 한 것으로 보는 제주도의 두무악이 있고 두모포는 성동구 옥수동 나루터의 옛 이름으로 중량천과 한강물이 합수하는 곳으로 두물개(二水浦) 두뭇개라고 부르던 곳이다. 이외에도 頭毛,斗毛,豆毛로 표기된 지명은 여러 곳에 있다.

벽련(壁蓮) 마을은 땅의 모양이 연꽃을 닮아 이름 지었다고 하며 푸를 벽(碧) 연꽃 연(蓮)을 쓰며 고유지명은 벽작개라고 한다. 연꽃 연자는 꽃 외에도 연밥을 의미하는 글자이기 때문에 연꽃 보다는 연밥을 닮은 포구라고 할 수 있으며 벽작개의 작(芍)자 역시 연밥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연밥은 썩지 않고 천년을 가기 때문에 고분에서 발굴된 연밥의 씨앗이 싹을 튀어 꽃을 피우기도 하는 영물이다.

서불과차(徐市過此)는 양아 마을에서 부소암으로 오르는 중간쯤에 바위에 새겨진 그림 글자로 남해각자나 상주리 석각 등으로 알려진 암각화이다. 한때는 서시과차라고 하기도 했는데 이는 불(市)자가 저자 시와 슬갑 불로 읽히기 때문에 혼돈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서복(徐福, 徐市)은 중국의 제나라 사람으로 진나라 진시황28년(기원전 219)에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초를 구하려고 동남동녀(童男童女) 삼천 명을 데리고 갔다고 사기에 기록이 남아있지만 돌아온 기록은 없다. 

서불에 대해서는 중국,대만,한국,일본의 학자들의 관심이 많지만 각자의 주장은 다르다. 먼저 출발지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2곳으로 비정하며 도착지는 일본, 대만, 발해만, 한국 등으로 주장을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서불과지는 제주도의 서귀포, 거제 해금강의 서불과지, 남해 양아리의 서불과차 암각화가 있다. 그러나 양아리의 암각화에 대해서는 서불과차 기록설과 우리나라 고대문자 설, 별자리 설이 있으며 그 진위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세존도는 양아리 남쪽 먼 바다에 있는 무인도로 섬에는 두 개의 큰 바위 구멍이 있다. 석가세존이 금산에서 둘로 배를 만들어 타고 이 섬을 지나갔는데 그때 배가 빠져 나간 구멍이 남아있다고 전해지고 있는 섬이다. 그래서 섬 이름을 세존도라 하였으며, 남해 문견록에는 유혈도(有穴島)로 적고 있어 구멍섬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벽련마을 서남쪽 바다에는 삿갓모양의 노도섬이 있다. 옛날 이곳에는 노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목재가 많아서 노도(櫓島)라고 했다는 설이 있지만, 현지 사람들은 멀리서 보면 삿갓과 같아 삿갓섬이라고도 부른다. 이 섬은 조선 숙종 15년에 서포 김만중이 기사사화로 유배를 와 귀양살이를 하다가 숙종 18년에 사망을 한 곳이다. 김만중은 이곳에서 위리안치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어머니를 그리는 사친시를 남겼고 국문소설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남겼다. 이곳 노도의 골짜기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바다만 바라보던 노자묵자 할배가 병들어 죽자 그의 유언대로 시신을 묻은 노지나 묏등이라고 하는 묏자리가 있다. 지금은 문학의 섬으로 문학관, 서포초옥,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주제로 한 정원을 만들어 등장인물들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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