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리(鎭洞里)는 남해군으로 이속되면서 적량, 대곡, 장포마을을 합하여 새롭게 지은 이름으로 둔칠 진(鎭) 마을 동(洞)자를 쓰니 군사가 주둔하던 진이 있었던 마을이다.
적량리(赤梁里)는 동쪽에서 해가 뜨면 성이 햇빛에 붉게 반사되는 곳이라거나, 해가 뜨면 붉은 빛이 반사되는 마을에 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아 붙여진 지명이라 전하며 붉을 적(赤) 들보 량(梁)자를 쓴다.
적량 마을 앞에는 인공으로 바다를 파내어 만든 선박 피난처인 굴항(굴강, 掘江)이 있었으나 지금은 훼손이 되어 흔적만 볼 수가 있다. 또 굴강을 만들면서 생긴 둔담의 흔적도 남아있다. 둔담은 마을앞 해변에 인공으로 쌓은 둑을 말한다. 성안마을은 옛날 성안에 있었던 마을이며 성내라고도 한다.
적량이라는 지명은 태종 7년(1407)에 만호를 차견하였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철종 13년(1862) 적량진을 혁파할 때까지 총 60회나 거론이 되는 중요한 영토 방위의 요해지였으며 말 목장을 관리하는 중심지였음을 알 수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중요 사안을 보면 다음과 같다.
태종 7년(1407) 적량만호 차견하고 군과 병선이 없다./ 세종원년(1418) 병선을 두고 주민을 보호하다./ 세종 5년(1423) 창선도에 농사짓는 것을 허용하다./ 세종13년(1431) 별망을 두어 주민을 보호하다./ 세종 14년(1432) 적량의 선박을 나누어 옮기다./ 세종 21년(1439) 적량의 병선을 지도포로 옮기다./ 세조 3년(1457) 지세포의 선군을 적량에 나누어 소속시키다./ 성종 16년(1485) 적량에 보 설치 둘레가 1500척, 샘과 못이 있다./ 성종21년(1490) 적량성 둘레 1182척 높이 13척이다./ 중종 39년(1544) 성 안에 물이 없어 물이 있는 곳으로 진을 옮기다./ 철종 13년(1862) 적량진을 혁파하다.
적량(赤梁)이라는 지명은 관방진(關防鎭) 설치와 동시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문헌에 의하면 목장개설(1400년대) 이후 이의 관리 감독을 위하여 감목관(監牧官)을 둔 것이 1600년대로 그동안의 200년간은 적량진의 수군만호(萬戶)를 첨사(僉使-僉節制使의 略稱)로 격상, 감목을 겸직케 한 역사적 유래를 갖고 있는 역사적 마을이다,
같은 지명으로 여수시의 적양동(赤良洞)은 홈피를 보면 적량부곡(赤良部曲)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의 특수행정구역으로 삼일포항 동쪽에 있었으며 황토가 많아 붉말이라 불리었다. 적량의 군장에서 수군을 창설하여 창선도에 이동하여 주둔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적고 있지만 실증할 자료는 없다. (한자의 梁과 良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대곡리(大谷里)는 큰 대(大) 골 곡(谷)자를 쓰며 골짜기가 깊고 농토가 넓은 마을로 우리말 지명은 큰 골 마을이다.
장포리(長浦里)는 해안선이 길어 길 장(長) 개 포(浦)자를 쓰며 고유 지명은 장개, 긴개, 진개로 불리던 마을이다. 장포리의 역사적 기록은 태종7년(1407) 남해현의 장곶(長串), 적량(赤梁) 등처에 근래에 만호(萬戶)를 차견(差遣)하고, 소속한 군인과 병선이 없으므로 병세(兵勢)가 고약(孤弱)하여 방어가 허소(虛踈)합니다. 긴요하지 않은 장곶(長串)은 구라량 만호(仇羅梁萬戶)와 노량 만호(露梁萬戶)로 하여금 겸하여 거느리게 하고, 적량 만호(赤梁萬戶)는 혁파하여 버리소서.
세종 13년(1431) 흥선도(興善島) 동편 바깥쪽 걸망포(巨乙亡浦) 바깥쪽 장곶(長串)에는 백성들의 거주 및 경작을 금하고, 걸망포 안쪽의 전토는 인민들을 내면으로 옮겨 살도록 하여, 적량(赤梁) 근처에 별망을 두어 수호하고 내왕하면서 경작하게 하였다. 진주목읍지 목장지(牧場誌)에는 장포동(長浦洞)으로 되어 있다.
진동리에는 해안선의 굴곡이 많아 개와 골도 많다. 늦테개는 미나리개 다음에 있는 곳으로 옛날에는 늪지대였다고 한다. 1992년에는 구석기시대 유물인 돌도끼종류가 발견되었다. 모상개는 장포마을의 동쪽에 있으며 창선면에서 가장 큰 모래사장이 있는 곳으로 주변의 바위들이 인상적인 해안이다. 쇳개 또는 샛개로 불리는 적량 마을 앞 해안은 첨사가 진을 치고 병기를 만들었다고 하며 쇠 금(金) 개 포(浦)를 써서 금포라고 불리기도 한다.
삼층개는 장포와 구도 마을의 경계에 있는 개로 바다 밑의 바위가 3층으로 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삼칭이라고도 불린다. 아래개는 늦테 다음에 있는 개로 해산물이 많은 곳이며 애컨개, 보리짱개 등 고유지명이 남아있는 곳이 많다. 우순꼬지는 바닷가에 대밭이 있어 바위 틈에서 죽순이 자라는 곶이라는 지명이다. 장꼬지는 장포에서 길게 뻗어 나온 곳으로 경관이 아름답고 물살이 센 곶이며 연나리끝은 방파제가 있는 곳이다. 이 외에도 고유지명이 남아있는 골짜기는 간석골, 감나무 골, 도화골, 아디골, 봉석골, 큰골, 할미당골, 망하골, 목고랑, 부처방아골, 안골, 양지골, 어름나무골, 문방골, 신골 등이 있다.
국사봉(국사봉, 문필봉)은 적량 동북쪽에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 있는 곳으로 군 보호 문화재로 단칸 기와집 돌담이 있다. 첨사가 주둔할 때는 나라의 번창과 국왕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냈지만 지금은 섣달 그믐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당산제를 지낸다.
사포대(四砲臺)는 장포의 포구 안쪽과 바깥쪽 4곳에 옛날 첨사가 대포를 설치 한 곳을 이르는 지명으로 남산끝이라고도 한다.
장포리 일대에 조성된 힐링빌리지 안에 자리 잡은 라키비움 남해는 지상 2층으로 된 복합문화공간이다. 1층에는 만 여 장의 LP판으로 장식된 카페가 있고, 2층은 전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옥상에는 루프탑, 야외에는 테라스 좌석을 운영하고 있다. 라키비움(Larchiveum)은 도서관, 기록관, 박물관을 합친 용어로 복합문화공간을 의미한다. 라키비움 남해는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풍광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으로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라키비움은 광주시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세종시의 대통령기록관이 있다.
진동리에는 창선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선을 가진 곳에 남해 사우스케이프는 골프장이 있다. 이곳은 골프장 설계의 거장 카일 필립스가 설계한 곳으로 선 라이스와 선셑 두 코스로 되어있는 18홀 골프장이다. 해외 유명 골프장이 평지에 있는 반면 이곳은 단지 가운데 산이 있어 산을 안고 도는 코스로 되어있으며 독특한 지형과 해안의 멋진 풍광을 같이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모든 시설이나 환경이 세계 유명 골프장에 못지않은 국내 탑(TOP) 골프장으로 명성이 높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