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평현리에는 200년 전에 평리와 평고개리(平古介里)가 있었다. 평현은 읍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평현, 평곡, 평고개로 불리던 곳으로 평평할 평(平) 고개 현(峴)자를 써서 고개가 높지 않고 비교적 완만한 곳이라는 의미이다. 마을의 주민이 늘어나자 양지 편과 음지 편으로 나뉘었고, 양지마을은 양지 편에 있는 마을로 웃담이라고도 한다. 

평현 동쪽 길가에는 이 씨 집안의 열녀각(㤠女閣)이 있으며. 1737년에 세운 “烈女私奴林芬善妻蓮臺之閭(열녀사노임분선처연대지려)” 비가 있다. 진주진관 남해현지에 있는 내용을 보면, ‘김 씨의 딸이 신혼 첫날밤 신랑이 급사했다. 3년이 지난 후에 개가를 권하자 산속에 들어가 목을 매어 죽었다. 이듬해 봄 연대부인이 목맨 숲에 이상한 벌레가 나타나 나뭇잎을 열(㤠)자모양으로 파먹어 이 나뭇잎이 바람을 타고 이웃마을 까지 날아가서 동네사람들이 놀라워했다. 해괴한 일이 3년이나 계속되어 고을 판관과 의논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 왕이 감동하여 연대라는 호를 내리고 열녀각을 짓게 하였다. 남해현지에도 영조10년에 평고개에 정문을 세웠다’라고 적고 있다. 

봉성리는 송등산 북쪽 산기슭에 있는 산골 마을이다. 마을 남쪽으로는 봉성천이 흐르며, 평지가 많지 않아 농지가 적다. 서면의 연죽리에 속해 있었으나 행정업무에 거리가 멀어 불편함을 호소하는 주민들의 민원에 따라 1983년 읍으로 이관 되었다. 임란 때 최 씨들의 피난처로 사방이 막혀 새집과 같다 하여 조방리(鳥坊里)로 불리었으며, 지석묘가 있고 상수도 수원지가 있다. 후에 은봉산(隱峰山) 봉황(鳳凰)의 보호를 상징하는 봉화(烽火) 산맥이 부락 동쪽을 가로막아 둘러쳐진 곳이라 하여 봉성리(鳳城里)라 하였다. 남해현지에는 조방리(鳥坊里)는 현에서 십리(鳥坊里官門十里)에 있다고 적었다.

신촌마을은 남산 너머 남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옛 지명은 사부랑 이라고 하며, 우모라고도 불렀다. 야촌과 분리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촌이라 했으며 고유지명은 새터말 인데 이 것이 와전 되어 쇠털말이 되고 한자로 옮기면서 쇠 우(牛) 터럭 모(毛)자를 써서 우모말이 되었다. 지형이 떠 보이고 물결이 이는 것 같다하여 사부형(沙浮形)이라했는데 후에 사부랑이 되고 야촌은 들 사부랑이 되었다고 한다.

야촌마을은 들말 이라고 부르며 들사부랑 마을이다. 옛날에는 우모구라고 불리었으며 들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들 야(野)자와 마을 촌(村)자를 쓴다.

평리마을은 들 평(坪) 마을 리(里)자를 쓰며 고유지명은 들말 이며 다른 말로는 야촌 이다. 옛 날에는 들사부랑이라 했으며 뗏목을 타고 고기를 잡거나 바다를 건너 다녔기 때문에 뗏목 사(槎) 뜰 부(浮) 물결 랑(浪)자를 싸서 사부랑이 되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의미는 전하지 않는다. 전국에는 사부랑 재,골,개 등이 있고 벼슬 이름이거나 부자에 관련된 유래도 있다., 

내금마을은 당집 너머에 있는 마을로 예부터 있었던 마을이다. 금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조사를 해보니 금맥이 확인되어 안에 금이 있다는 뜻으로 안 내(內) 금 금(金)자를 쓰서 내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외금마을은 옛 이름은 세퍼니, 서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금맥을 찾던 사람들이 조사 후에 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외금이라 했다고 한다. 한자로는 밖 외(外) 금 금(金)자를 쓰며, 평리 동쪽에는 금굴이 남아있다.  

진주진관지 남해현에는 금동리(金洞里)로 표기되어 있다. 금동리는 쇠 금(金) 마을 동(洞)자를 쓰며 고유지명은 쇠말이다. 마을이 늘어나면서 괴음산과 호두산 안쪽은 내금마을로 야촌이 있는 쪽은 외금으로 나누었다. 마을이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세퍼니, 쇠퍼니라고 불렀다거나 쇠를 퍼내는 곳이라는 의미라고도 한다. 

광포리(廣浦里)는 넓을 광(廣) 개 포(浦)자를 쓰며 넓은 개, 넓은 포구라는 의미이다. 고유지명은 너웃개, 너우개라 하였으며 옛날에는 봉내를 따라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이다. 봉내는 파천(巴川), 봉천(鳳川)이라고 하며, 마산 마을 앞을 흐르는 내와 아산으로 내려오는 내가 합하는 곳을 여분내라 하였으며 그 앞 개를 파천포라 하고 들판은 파천들이라고 했다. 

파천 들은 죽산마을 앞 들로 봉천의 홍수로 인해 피해를 심하게 입어 파천(破川)이라 했다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이 없고 다른 지역의 파천도 유래가 전하지 않아 파천과 봉천의 관계를 알 수가 없다. 예 지도에는 ‘파천포는 현 동 오리에 있고 어량과 염밭이 있다(懸東五里有 魚梁, 鹽所)’고 적고 있지만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농지로 변하고 폐수처리장이 되었다. 둑의 길이는 1km정도이다.

마산마을은 말 마(馬) 뫼 산(山)자를 쓰며 마을 뒤에 있는 남산의 지형이 말이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지은 이름이다. 읍에서 서면으로 나가는 남산의 남쪽에 있으며 말뫼, 몰뫼라고도 하였다. 마산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에 있으며 천마산, 용마산 등 마산 아래 있는 마을이거나 뒷산이 말의 형태를 닮았다 하여 지은 것이 대부분이다.

마산시의 경우 마산이라는 명칭 유래는「세종실록」에 마산창(馬山倉)이나 「동국여지승람」에 마산포(馬山浦)라는 언급이 있다. 명칭의 유래에 관하여는 고려의 조창 관련설, 오산(午山, 용마산) 관련설 등이 주장되고 있다. 조창 관련설은 고려 성종 때에 전국에 조창을 설치하였는데, 석두창이 마산에 설치되었다. 두 척이란 쌀을 재는 말(斗)과 자 척(尺)의 합성어로 쌀을 재는 말을 뜻하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소리가 같은 말 마(馬)로 옮긴 것이 마산으로 표기되었다는 것이며, 용마산 설은 용마산(龍馬山)을 오산(午山)이라 부르다가 마산(馬山)으로 부르면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들말이나 벌말은 고유지명으로 한자로 바뀌면서 평촌(坪村),야촌(野村),평리(坪里), 평동(坪洞)이라고 하며 들판에 조성된 마을을 말한다. 경기도의 평촌(坪村) 신도시도 순우리말 지명인 벌말을 한자화 한 지명이다. 벌말은 허허벌판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며, 마을이 늘어나면 윗벌말, 아랫 벌말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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