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의 진산은 망운산(786m)이다. 망운산은 남해도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남쪽해안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반면 금산(681m)은 망운산보다 낮은 산이지만 명산으로 알려져 남해를 대표하는 산이 되었다. 금산은 비단 금(錦)자와 뫼 산(山)자를 씀으로 비단 산이라 할 수 있지만 금자는 비단이라는 뜻 외에 아름답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금산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에 있다. 행정구역으로 충남에 금산군이 있고 지역명이나 산 이름으로 쓰이는 곳이 10곳 이상이 있으며, 이름의 뜻은 비단같이 아름다운 산이거나, 옥녀직금의 명당자리라고 설명을 한다.
남해 금산은 삼국시대에는 섬진강을 거쳐 왜나 중국과 통하는 관문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을 감시하는 첨망대와 방어진지였으며, 조선초기에도 왜구의 방어 진지와 말을 키우는 목장지로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배지가 되었지만, 많은 문사들이 남해의 경관을 작품으로 남길 정도로 금강에 못지않은 아름다운 산이다. 금산에는 골짜기나 바위마다 전해오는 이야기가 많다. 그중에서도 이성계의 백일기도 산,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러 온 산, 부소가 귀양 온 산과 보리암에 관한 설화가 중심을 이룬다.
이성계의 조선개국 설화는 왕이 되기 전에 명산을 찾아다니며 산신들에게 기도를 할 때 보광산에 들어와 삼불암 아래에서 기도를 하다 맞은편 큰 바위 위에 작은 바위 세 개가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산신에게 기원했다. “산신이여 제가 중국까지 정벌하여 황제가 될 수 있으면 3개를 세워 주시고, 나라의 임금이 될 수 있으면 2개를 세워 주시고, 재상이 될 수 있으면 1개를 세워 주십시오.” 마지막 기도가 끝나는 날 이성계는 기둥 3개를 지고 가는 꿈을 꾸었다. 이성계는 왕이 되면 산을 비단으로 덮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보광산을 비단으로 덮으려 했으나 신하들이 비단으로 산을 덮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보광산을 비단 금자를 쓰서 錦山으로 바꾸는 것을 주청하여 금산이 되었다고 한다.
설화를 뒷받침하는 것은 금산 7경인 이태조기단과 9경인 삼불암이 있다. 설화는 주민들에게 구전으로 전하다 남해군민의 청원에 따라 선은전을 세웠다. 선은전(璿恩殿)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건국 100일 기도를 올렸던 곳으로 이태조기단으로 불리는 곳이다. 비각 안에 있는 왼쪽 비는 남해금산영응기적비(南海錦山靈鷹紀蹟碑) 오른쪽 비는 대한중흥공덕시성비(大韓中興公德視聖碑)라 한다. 이성계가 이 장소에서 선유제를 지내고 왕이 되었다고 하여 철종이 전각을 짓고 전패를 모셨다. 세월이 지나 전각이 낡아 1903년 용문사 후원으로 전각을 옮겼는데 이때 금산 보리암 동쪽 삼불암 밑에 윤정구의 지휘로 비각을 짓고 2기의 비를 세웠다.
왕조실록에 남아있는 이성계의 활동지역은 주로 동북방이었고 육군으로 활동을 하였다.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한 황산대첩에서 승리한 후에는 남쪽으로 내려온 기록이 없다. 전국을 돌며 백일기도를 하였다는 것도 후대에 만들어진 이성계의 설화중 하나로 생각을 한다. 또 선유(宣諭)제는 임금이 되기를 바라는 제사가 아니라 임금의 명령을 백성에 공포하는 것이며, 조선 초기부터 명산에 목장을 만들 계획을 하는 것도 선왕의 유지와는 맞지 않는 것이다.
금산 중턱에는 35경인 서불과차가 있다. 이 석각은 중국 진나라 시대 서복이 불로초를 찾으러 남해 금산을 지나가면서 새긴 것이라 한다. 석각이 서불과 관계가 있다는 해석에 따라 보존하고 있지만 석각이 별자리라는 주장을 하는 의견도 있다. 서복의 불로초 탐방은 중국의 사서 사마천의 사기 시황제 편에 “제나라 사람 徐福(徐市)등이 바다 건너에 삼신산이 있는데 봉래(금강산) 방장(지리산) 영주(한라산)라 하며 그곳에 산신들이 살고 있으니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산신을 찾아오게 해달라는 청을 하였다. 허락을 받은 서불은 동남동녀 수천 명을 데리고 산신을 찾으러 바다로 나아갔다는 기록이 있으며, 산둥 반도 끝자락에는 서복 출항지가 남아있다. 이와 연관지어 남해 금산 양아리, 제주 서귀포, 거제도, 일본, 대만 등지에 서복이 지나갔거나 남아서 살았다는 설화가 있다.
금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34경인 부소암이 있다. 바위의 형상이 사람의 뇌를 닮았으며 법왕대라고도 한다. 부소(영부소, 嬴扶蘇)는 진시황제(秦始皇帝)의 장남이다. 총명하여 아버지와 많은 중신들로부터 장래를 촉망 받았지만 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간언했기 때문에 분노를 사 북방의 기마민족인 흉노에 대한 국경경비 감독을 명령받아 장군 몽염(蒙恬)과 함께 벽지로 보내졌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 사후에 후계문제와 연관되어 스스로 자결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부소대의 설화는 지역이나 시대적으로 볼 때 관련이 적은 것으로 보이며 후대에 서불과차와 연관지어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을 한다. 부소는 전국에 있는 지명으로 부소산, 부소령, 부소치, 부소악 등 있으며 지명의 유래는 크게 3가지로 구분이 된다. 부소는 도울 부(扶) 차조기 소(蘇)자를 쓰며 부여에 있는 부소산은 소나무의 고어인 부소(풋소)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개성에 있는 송악산의 옛 이름도 부소산이었다고 한다. 다른 유래는 중국의 고전 시경 정풍에 실려 있는 산유부소(山有扶蘇) 습유하화(隰有荷華) 산유교송(山有喬松) 습유유룡(隰有游龍)이라는 시의 집주에서 부소(扶蘇)는 부서(扶胥)라 작은 나무가 무성한 것을 말한다고 하며 교송과 반대되는 뜻이라고 하였다. 또 부소는 전차의 위를 덮어 화살을 막는 씌우개를 말한다. 부소암(扶蘇岩) 중간에는 부소암(扶蘇庵)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암자의 현판에 소(蘇)자를 비틀어 놓은 뜻이 궁금하다.
금산의 옛 이름은 보광산 이었다. 고성군 무선리 무이산에는 문수암이 있다. 신라 성덕왕5년(706)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는 문수암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의상이 남해 보광산(普光山:지금의 錦山)으로 기도하러 가던 길에 무선리의 민가에 묵게 되었다. 꿈속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내일 아침에 걸인을 따라서 보광산보다 무이산을 먼저 가보라고 하였다. 고 하며 보광이라는 말은 보석에서 나오는 광채를 뜻하기 때문에 사찰이나 지명으로 많이 사용되었기에 오랜 역사를 지닌 지명으로 본다. 또 남해 호구산에 있는 용문사 기록에도 보광사는 금산의 보광동에 있었으며 유생들의 요구로 호구산으로 옮겨 용문사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보리암(菩提庵)은 남해군 상주면 금산(錦山) 남쪽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원효가 창건한 암자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다. 신문왕3년(683)에 원효(元曉)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 하고 초암의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라 하였다. 1660년(현종 1)에는 현종이 절을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보리암이라 개액(改額)하였다. 그 뒤 몇 차례의 중수와 중건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하여 간성각(看星閣), 산신각, 범종각, 요사채 등이 있다.
보리암은 가야불교와 관련 있는 사찰로도 알려져 있다. 옛날 가락국 수로왕의 왕후인 아유타국의 허왕옥과 함께 배를 타고 온 장유선사가 지은 절로 봉안하고 있는 관음 보살상과 삼층석탑의 파사석이 그 증거라고 하기도 한다. 보리암에는 2개의 지정 문화재가 있다.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575호인 목조관음보살좌상 불감과 제74호인 삼층석탑이다. 두 개 모두에 가야불교와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왕의 칠 왕자도 외숙인 장유국사(長有國師)를 따라 출가하여 남해 금산(錦山)에서 수도하다가 다시 가야산을 거쳐 지리산 반야봉에서 수도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였다는 설도 있다.
남해의 명산인 금산에는 단군과 산신을 모시는 단군성전이 있어 국조인 단군과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대장봉을 비롯한 26개의 기암들이 각기 다른 자태와 설화를 지니고 있고, 가사굴을 포함한 4개의 굴, 망대, 탑대, 세존도 등 38경이 색다른 풍광과 역사를 지니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홍련암, 보문사, 향일암과 더불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기도처로 유명한 보리암이 있다. 이들 암자들은 모두가 해수 관음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출과 일몰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이며. 금산에 올라 망망대해를 내려 보는 것도 좋지만 바다에서 쳐다보는 경치도 장관이다. 조선의 선비들이 금산에 다녀간 것을 시로 남겨 자랑할 만큼 한번 가보는 것이 원이었으며, 남쪽바다의 노인성을 만나고 간 사람들은 무병장수의 복을 받을 수도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명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