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상죽리(上竹里)는 마을에 큰 대밭이 있는 대밭 마을이다. 대밭 위쪽에 있는 마을은 상죽이라 하고 위 상(上), 대 죽(竹)자를 쓰며, 대밭 아래쪽에 있는 마을은 아래 하(下), 대 죽(竹)자를 써서 하죽이라 한다. 옛 자료에는 호음동(好音洞)과 죽전동(竹田洞)이 있었으며 지금의 상죽리는 호음동, 웃 대밭(上竹,동산동), 아래 대밭(下竹), 3개 마을을 합하여 만든 지명이다. 일반적으로 마을은 시간이 지나면 주민이 늘어나 분동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상죽리의 경우는 축소 된 것으로 보아 자연재해나 출향하는 호수가 늘어나 주민이 줄어든 것을 추정할 수가 있다.

호음동(好音洞)은 홍골 홈동이라 불리는 곳이다. 마을 뒷산에서 들리는 메아리 소리가 맑고 곱다고 하여 좋을 호(好) 소리 음(音)자를 써서 마을 이름을 호음(好音)이라 했다고 한다. 하지만 호음은 한자의 뜻이 아니라 소리를 빌려온 글자이기 때문에 호음은 홈을 표기한 글자로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홈골마을이며 이는 홍골마을로 와전되기도 한다. 지금은 많았던 대밭은 줄어들고 한때 수해를 입어 높은 곳으로 이주를 하여 동산동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마을 안길이 길게 이어져 있어 골목 마을이라고도 한다.

수산(水山)리는 번덕, 물미, 물뫼, 문산 등으로 불리는 곳으로 물 수(水) 뫼 산(山)자를 쓰니 당연히 물산이며 물산의 고유 지명은 물뫼가 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을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늘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마을 앞을 지나가던 탁발스님에게 화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더니 마을 뒤 남산에 있는 큰 바위가 불을 일으키는 화암상(火岩像)이니 마을 이름을 물뫼라고 지으면 예방을 할 수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뭍뫼로 하였으며 이를 한자로 고치니 수산(水山)이 되었다, 고 한다.

부윤리(富潤里)는 옛날에는 수산과 한동네 이었으며 인구가 늘어나자 식수가 부족하여 공동우물을 파게 되었는데 물맛이 좋아 물매(勿每)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주민들이 늘어나 동세가 확장되자 부자가 나와 윤택해지라는 뜻으로 새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부윤리(富潤里)는 물뫼, 물미라고 불리던 마을이며 넉넉할 부(富) 더할 윤(潤)자를 써서 재물이 넉넉하고 윤택한 마을이 되기를 바라는 지명이다. 옛날에는 마을 앞까지 개울이 깊숙이 들어와 농토가 좁고 주민도 많지 않아 조산등을 중심으로 수산(水山)마을과 같은 동리로 되어 있었다. 후에 장내(昌善川)가 정비되어 일부는 번덕 쪽으로 이동하여 수산마을로 형성되었고, 일부는 물뫼 쪽으로 이동하여 1906년 남해군으로 이속되면서 죽산(竹山)마을과 구도(舊島, 舊梁洞)마을을 묶어 부윤리라는 새로운 동명이 되어 졌다. 고유지명인 물미는 물뫼에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부윤2리(富潤2里)의 고유지명은 구도이다, 마을의 산수가 부자를 배출할 수 있는 명소라 하여 부윤이라 하였다고 하며 마을 동남쪽 바닷가에는 구도 라는 마을이 있다. 고유지명은 거북 섬으로 마을 앞에 있는 섬이 거북을 닮아 거북 구(龜)자를 써서 구도(龜島)라 불렀으며 섬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가 있어 구량(舊粱)이라 불렀고 구디라고도 한다. 

임진란 때에는 군사들이 진을 치고 지켰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섬의 북단에는 석축한 성터가 남아있으며 이곳을 예방 끝이라고 부른다. 진주목지에는 구량동(舊梁洞)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섬에는 옛 진터가 남아 있었지만 바다를 접한 곳에 성지가 있으나 안쪽은 논이나 밭으로 개간이 되어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구전에 따르면 병선을 감춘 굴항도 있었다고 한다. 

중종 39년(1544)에 적량(赤梁)성 안에는 샘이 없어서 늘 7∼8리 밖에서 길어야 하므로 수사(水使) 윤담(尹倓)은 물이 있는 곳으로 진을 옮기고자 하나, 조정의 영이 없으므로 감히 하지 못하는데, 만약에 옮기는 것을 허가하더라도 번을 드는 데에서 빠진 군사를 부릴 것이므로 폐단이 되는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진양지(晉陽誌)에는 옛적에는 창선도 남쪽에 있더니 지금은 창선도 동쪽으로 옮겼다 무슨 일로 옮겼는지 알지 못하겠다. 

대산골(竹山)은 물뫼마을에서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뒤편 야산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대산골이라 했다,

구 목관터(舊牧官趾)는 창선초교 서쪽 산록 일대가 옛날의 청사 터 일뿐 아니라 옛날의 현청(縣廳)터이다, 1956년 면 청사를 현 위치로 옮기기 전애는 구옥(舊屋)을 지붕과 창문 실내구간을 개조하여 썼고 남쪽에는 구옥이 원형대로 남아있어 창고로 사용 했다, 

부윤리에는 민막 터가 있고 수산리에는 昌善牧賭稅蠲免丁氏益煥事蹟碑(창선목도세견면정씨익환사적비)가 있다. 조선 말기에 도세 저항 운동을 한 정익환을 기리는 비다. 1차 갑오개혁으로 그 동안 면세지였던 목장토에 도세가 부과되자 도세저항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정익환은 창선에 살던 사족 층으로 진주목 산하 목장의 도세 저항운동을 주도했으며 당대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던 도세 저항운동을 배경으로 창선목장에서 일어난 도세저항운동을 기록한 심심가를 운동의 초창기에 해당하는 1898년에 창작하였다.

심심가(尋心歌)는 한국가사문학관에 소장되어 있는 4음보를 1구로 하여 총 495구나 되는 장편가사이며 한글로 필사된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은 남해 창선목장(昌善牧場)이다. 이 목장은 남해군 창선면에 있는 것으로 조선조에 설치되었다. 국마(國馬)를 방목하였으며 감목관(監牧官)을 두었는데 전결(田結)을 주어 그 세금으로 말을 기르게 하였다고 한다. 심심가는 창선목장의 관리들이 지역 백성들을 상대로 수탈을 일삼자 그를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금을 거두어 절반은 나라에 바치고 절반은 목장의 관리들에게 내게 되어 있는데 각 목장에서 한두 명씩 관리를 두면 족할 것을 필요 없는 관리를 5-60명이나 두어 그들에게 내는 상납금이 늘어나 이 지역 백성들이 빈곤해졌다는 괴로움을 작자는 술회하였다. 

심심가의 작품내용은 감관으로 내려온 조 씨 위원과 문 씨 위원, 그리고 관속들의 비리를 낱낱이 고발했다. 또 백성에게 도세저항운동에 동참해주기를 호소하고 그간 벌어진 과정과 자신의 노력을 서술했다. 그리고 신 관찰사를 향해 감관들에 대한 조사와 도세 문제의 해결을 호소했다. 심심가는 민중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고자 하는 현실인식을 보이고 있으며, 경남지역 가사문학을 풍부하게 해준다는 점과 갑오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응하여 창작된 유일한 가사라는 점에서 가사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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