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민이 직접 투표하는 선거법은 1919년 해외(중국상해) 임시정부 시기에 임시헌장을 제정해 모든 국민이 평등한 선거권을 가진다고 명시했다. 근대적 선거제도의 시작이었다. 그 후 1948년 제헌국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것은 남한지역에서만 실시한 최초의 직접 선거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유신헌법 하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이 선출되고 그 여파로 지방에서도 소수 기초단체장들이 선출되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제9차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부활했는데 대한민국 선거제도의 중대한 변화의 출발이었다. 세월
몇 해 년 전 오른팔이 마비되어 거의 옆구리에 붙어버린 채 생활하던 어르신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심성(心性) 치유 상담 자리에서 만난 그 어르신은 친자식이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무시하고 사업을 한답시고 평생 모은 돈을 날려 버렸을 때, 그때 받은 충격으로 일순간 몸이 굳어져 버리고 팔도 마비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팔 근육에는 특별한 외상은 없는 듯 보였지만, 몇 년째 그렇게 하여 살아왔다는 어르신의 이야기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심한 충격을 받았으면 팔과 근육이 마비될 정도라니, 그것도 오랜 시
봉화(鳳花)리는 봉촌(鳳村) 마을의 봉자와 삼화(三花)마을의 화자를 따서 이름 지었다하며, 옛 지명은 삼거리라 불렀다. 전국에는 여러 곳에 봉화마을이 있지만 대부분이 옛날 봉화(烽火)가 있었던 마을이지만 이곳은 특이하다. 봉촌 마을은 옛날에는 금산아래 깊은 골짜기에 있어 내산이라 불리던 곳이며 새 봉(鳳) 마을 촌(村)자를 쓰니 고유 지명은 새마을이다. 새들이 사는 산골 마을이라니 운치 있는 지명이지만 바다와 접해 있지 않은 산골마을이다. 마을 지명에 새 봉(鳳)자가 들어가는 곳은 봉황이라는 뜻보다는 새로 생긴 마을(新村)을 뜻하는
전래의 세시풍속 가운데 축제의 성격을 가지는 현상을 선택하여 묶어보았을 때, 전통 축제의 고유한 측면이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분류에 따를 경우 세시풍속, 무속, 유식동제, 마을 단위의 놀이 등 축제로 분류하기에 이견이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일정한 기준을 두어 설명할 수 있다.행위의 동기로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민간 신앙, 의례를 갖춘 형식은 유식동제, 읍치제의와 마을굿, 고을굿 등이 있을 것이다. 유희성을 확보하는 최소 기준은 연행 과정에서 유발되는 정서적 즐거움이다. 행위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즐거움은 기록된 자료
예술 분야는 그 어느 직종보다 내면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심신을 정화하는 데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예술인의 역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더욱 이러한 인식에 공감하게 됩니다. 물론 사회를 정화하기 위한 노력은 예술 분야뿐만이 아니라, 각종 단체나 기관에서 꾸준히 전개해 오고 있는 사안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기관들의 공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예술은 사회 정화는 물론, 인간의 내면을 안정시키는 역할에서 어떤 분야 못지않게 지대한 공적을 남기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금송(金松)리는 마을 앞의 산모양이 거문고와 같다하여 금성(琴城)이라 불리었으나 이름이 어렵다하여 금송으로 바꿨다고 한다. 한때는 금송(錦松)으로도 불리었다, 금송리는 쇠 금(金) 소나무 송(松)자를 쓴다. 금송은 일본 남부 고야산이 원산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나무이다. 공주 무릉왕릉의 관재로 사용 될 만큼 고급 자재로 쓰이긴 하지만 일본이 원산이라는 이유 때문에 현충사 안에 있던 금송을 다른 곳으로 옮겨 심는 일도 있었다. 그런 금송을 마을 이름으로 바꿨다고 하니 이해가 안 되며 우리나라 고유종인 금송(錦松)으로 바꿔야 할
탈춤의 춤사위는 대체적으로 그 동작의 생성원리가 정신을 한 곳으로 모아 맺고, 그것을 어르다가 푸는 순서의 형식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춤에 따라 동작의 시작과 종지가 뚜렷하게 나타난 매듭춤과, 시작과 종지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은 유동적인 움직임의 춤들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춤사위는 탈이 신앙적이고 자연 모방적인 가면에서 사회가면과 예술가면의 성격으로 변모되어 오듯이, 춤 자체도 처음에는 자연의 모방과 농경 행위, 성행위 또는 귀신을 격퇴시키는 무속신앙과 결부된 행위였다.그러던 것이 점차 탈놀이의 성격 변화에 따라 풍자적인 춤 등
다소 쌀쌀함이 깃들기는 해도 완연한 봄날입니다. 이 봄을 잇기 위해, 이 따스함을 잇기 위해 봄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인내하였을까요. 겨우 내내 얼어붙은 대지 위로 부는 바람에 힘들어하며, 한설(寒雪)과 냉기에 움츠린 심기(心氣)를 달래면서 그렇게 봄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때로는 엄동설한 긴 밤을 고독으로 보내며 강하고 억센 비바람과 태풍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태를 유지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사계절이 순환하는 동안 거친 기상과 드센 동풍(凍風)에 휘둘리며 마음 아픈 적도 있었을 것이고, 뜨거운 햇살 아래 비지땀을 흘리며 봄 맞을
영지리는 선령곡(仙靈谷)의 영자와 약제인 지초(芝草)의 지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으며 한자로는 신령 령(靈) 지초 지(芝)자를 쓰며 영지버섯이 생각나는 마을 지명이다. 주민들은 사는 마을이 신선이 사는 신령스러운 땅, 영지(靈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지명이 아닐까? 선령골은 소슬령 솟을령과 같은 말로 솟다와 섰다가 같은 의미를 가진 지명으로 추정을 한다.시문(矢門)리는 시문동(矢門洞), 살문이라고 하며 한자로는 화살 시(矢) 문 문(門)자를 쓴다. 고려 말 백이정 선생이 내려와 살면서 홍살문을 세웠기 때문에 그 때부터 시문
예컨대, 천신을 나타낸다는 연닢은 등에 학(鶴)을 그린 청창의(靑氅衣)에 붉은 띠를 매고, 푸른 행전(行纏:바지를 입을 때 정강이를 감아 무릎 아래에 매는 물건)을 치고 화선(畫扇:색칠을 한 부채)을 든다.지신을 나타낸다는 눈끔적이는 등에 호랑이를 그린 장삼을 입고 붉은 띠에 회색 행전을 친다. 관을 쓴 중인 완보는 등에 용을 그린 장삼을 입고 붉은 띠에 회색 관을 쓰고 꽹과리를 갖는다.노장은 등에 호랑이를 그린 회색장삼을 입고 붉은 띠에 회색 행전, 송낙(볏짚으로 우산처럼 만든 모자)을 쓰고, 목에는 긴 염주, 손목에는 작은 염주
설천면 문항리 남해 3·1운동 발상 기념탑 앞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 오늘의 정세가 그때의 암울했던 시기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귓전을 울리는 만세 소리는 가슴에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 묘한 여운, 아마 그것은 여전히 우리가 담아내지 못한 대통합에 대한 아쉬움은 아닐까요. 아니 어쩌면 105주년이라는 장구한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아있는 진리에 대한 목마름,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의 샘을 정착시키지 못한 아쉬움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독립 만세 운동을 불렀던 당시의 열정만큼이나 오늘에 있어 우리의
난음(蘭陰)리는 난현내리(蘭縣內里)로 불리던 곳으로 신라시대 전야산군의 속현이었던 난포현의 중심 마을이다. 난포, 난읍, 난부(蘭府) 등으로 불리었다. 고려 때 중국 명사가 이곳의 지형을 보고 난음의 뒷산이 난초꽃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그 산을 난화산, 난화방(蘭花坊, 나암방)이라 부르고 산 아래 마을을 난음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신라초기에는 내포(內浦)현으로 불리다가 경덕왕이 난포현으로 고쳐 남해군의 영현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 때 명사가 지었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내포현이 난포현으로 바뀐 연유
파계승놀이와 양반놀이, 서민생활을 보여주는 놀이를 더 세분하여 ① 벽사(辟邪:귀신을 물리치는 것)의 의식무와 굿, ② 파계승에 대한 풍자, ③ 양반에 대한 모욕, ④ 남녀의 대립과 갈등, ⑤ 서민생활의 실상과 애환 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이것은 당시의 특권계급과 형식적인 윤리에 대한 일종의 비판정신을 구체적으로 연출하는 민중극이며, 세계 어느 나라의 민속극에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의 약점이나 시류의 악폐, 당시에 호사를 부리던 계층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패러디(parody)인 바, 이러한 서민문학성은
설 명절, 모처럼 문중 친족이 정말 오랜만에 자리를 함께하였습니다. 만남이야 늘 상 있는 일이지만, 문중 친족이 모두 모일 수 있는 날은 명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날따라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안부와 함께 문중의 사명과 얼을 계승하자는 내용도 그렇고, 향후 조성될 문중 묘지 문제를 비롯하여 시대가 바뀜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장례문화를 두고 열띤 토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시간이 많이 흘러 모임을 끝내려는 순간, 참석한 한 분이 “아! 그래도 그때 그 시절이 참 좋았지. 이
우리 온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을 살아가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직업들에 종사하면서 체력이 닿는 한 최후까지, 아니 죽음 직전까지도 일을 놓지 않고 아주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분들과, 그저 빈둥빈둥 놀고먹으며 편하게 살아가는 재주 좋은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옛날에 사농공사이라고 해서 직업들을 비교적 단순하게 생각했었는데, 요즘 직업은 1만여 가지가 넘는 직종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각각 분야별로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야 하고 여러 갈래로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들을 해야 하고 정말 복잡한 사회 환경에 적응하면
석평(席坪)리는 다정리와 무림리 사이에 있는 넓은 벌말로 건너편 난음리에 있는 비자당의 동산이 배를 엎어 놓은 모양과 같고 배의 돛이 들판을 덮은 것 같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석평리는 돗 석(席) 들 평(坪)자를 쓴다. 우리말 이름은 돗들이다. 돗은 돌, 덫, 돼지를 이르는 고어이지만 배의 돛과는 다른 말이다. 훈몽자회에서는 돗 석(席)자는 돗자리를 말하는 것으로 돗틀로 짠 돗자리와 가는 끈으로 엮은 자리로 구분하였다. 드물게 배에 다는 돛을 뜻하기도 하지만 돛은 한자로 돛 범(帆)자가 따로 있고 돛단배를 범선이라고 한다.
양주별산대놀이의 예를 들어 보면, 상좌·눈끔적이·왜장녀·애사당·소무·노장·원숭이·해산모·포도부장·미얄할미역은 대사가 없고, 그 밖의 배역들은 대사와 함께 춤과 몸짓으로 연기한다. 과거의 탈춤은 남자들만이 탈을 쓰고 놀았으므로 대체로 여자 탈은 대사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대사의 특징을 보면 봉산탈춤의 경우 비교적 운문(韻文)의 억양을 고집하고 있는 데 비하여, 양주별산대놀이는 평명(平明:알기 쉽고 분명함)한 일상 회화조의 대사를 주로 하고 있다. 그 중 옴중과 취발이의 대사는 이 놀이의 백미로 관중의 흥미를 끌었고, 영남의 탈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안다, 알고 있다는 행위는 사물의 본질이나 상태를 인지하였거나 이해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식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경험을 통하여 인지하는 연륜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안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앎이라고 표기해 봅니다. 이 앎은 그냥 우연히 생겨났다기보다 반복적인 학습의 과정을 통하여 성취되기도 합니다. 또한, 앎을 이끄는 방편도 의식이 안정적인가 아니면 감정적인가에 따라서 앎이나 안다는 작용이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비록 안다는 것에 뚜렷한 기준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주재하는 당사자
다정리(茶丁里)는 괴음산에서 흘러내린 입현천과 송등산에서 흘러내린 다천천 사이에 있는 마을로 들에 작설차(雀舌茶)밭과 정자가 있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다천과 금석마을을 합하여 다정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옛 지명은 다정천리(茶亭川里)였다. 다정천리는 차 다(茶) 정자 정(亭) 내 천(川)자를 쓰는 마을로 물이 흐르는 냇가에 차나무가 많았거나 정자가 있었던 마을로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물이 귀해 모린내라 불리는 냇가에서 차를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며 지금은 차 다(茶) 고무래
“산대놀이”는 고려 시대에 발생하여 조선 시대에 발전한 가면극 놀이로 ‘산대(山臺)’란 산대 놀음을 하기 위해 마련한 임시 무대를 이른다. 한길가 또는 빈 터에 대를 높이 쌓고, 그 위에서 연극 등을 하였다. 탈을 쓰고 소매가 긴 옷을 입은 광대가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노래와 재담(才談)을 곁들인다. 양반과 파계승(破戒僧)에 대한 풍자, 남녀의 삼각관계, 서민 생활의 어려움 등이 주를 이루며, 대체로 12마당으로 구성되었다. 모닥불이나 기름불로 조명하였으며, 탈막은 탈이나 옷을 갈아입는 곳으로 전체를 백포(白布)로 둘러싸고 탈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