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 모처럼 문중 친족이 정말 오랜만에 자리를 함께하였습니다. 만남이야 늘 상 있는 일이지만, 문중 친족이 모두 모일 수 있는 날은 명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날따라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안부와 함께 문중의 사명과 얼을 계승하자는 내용도 그렇고, 향후 조성될 문중 묘지 문제를 비롯하여 시대가 바뀜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장례문화를 두고 열띤 토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시간이 많이 흘러 모임을 끝내려는 순간, 참석한 한 분이 “아! 그래도 그때 그 시절이 참 좋았지. 이제 나이가 드니 어린 시절 때 맞이한 명절의 모습이 그립기까지 하다”며 어린 시절에 겪었던 명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나오자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는데, 한껏 고무된 표정에다 이구동성으로 어린 시절의 무용담까지 곁들여서 그런지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까지 합니다. 

필자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 젖다 보니 알게 모르게 어린 시절에 느꼈던 추억이 새삼 떠오릅니다. 그땐 참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열망을 지니기도 하였습니다. 어른은 키도 크고 무서움도 없었으며, 무엇이든 곧잘 만들어내기도 하고 일머리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세상 이치를 환히 꿰뚫고 있는 모습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에 매료된 필자는 어른이 갖는 당당함을 동경하여 나도 빨리 자라 어른이 되어야겠다며 다짐하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돕니다. 

그로부터 무수한 세월이 흘러 그 어린 시절의 소원처럼 어른이 된 지금, 필자를 비롯한 친족은 이 순간, 다시 어린 시절의 소담한 추억을 이야기하며 그때를 그리워합니다. 코를 훌쩍거리며 콧물이 코에서 길게 뻗쳐 옷소매로 이리저리 훔치던 어린 시절을 연상하고 있지만, 이제는 희끗희끗한 머리와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년의 마음에나 남아있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말입니다. 그때 그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것이 참 궁금도 하기도 하였고 호기심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러한 궁금증과 호기심은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라는 물음에 속 시원히 답을 해주지 못했던, 아니 질문에 대해 완벽한 답으로 응해줄 어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심화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린이가 의문을 가지는 것의 대부분이 있는 그대로의 진심과 사심 없음의 자연스러움에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연유에서 어린이가 던진 물음에 대한 답 또한 그러한 근거에 합당한 응답이 나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자연스러움, 걸림 없는, 사심 없음의 행보가 어린이를 비롯한 어른의 정서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게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린 시절의 소원만큼이나 지금 어른이 된 필자 역시 이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만치 사심 없음의 지혜나 자연스러움에 알맞은 행보를 담아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물음과 응답에 대한 논의는 차제에 두고라도 어릴 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또 어른이 되니 이제 다시 어린이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하지만, 인생사 전반을 아울러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사이에서 중심을 적절히 잡아줄 그 무엇(명상과 수련)이 있다면 이 양자를 넘나들 지혜를 담아내는 과정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소담한 추억을 잇게 할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마음의 시초가 될 원형을 그리워하고 찾으려는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 본성을 찾아야 하며 그러한 마음으로 회복하여야만 아이와 어른을 넘나들 마음 길을 제대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자각에서 원초적 생명인 본성이 가득한 어린이를 자연의 곁에 두어보십시오. 아마 그들은 쉼 없이 뛰어다닐 것입니다. 어른이 볼 때 어린이가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얘야! 그리 바쁘지도 않은데, 너는 왜 그렇게 급하게 뛰어다니느냐,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린이는 바빠서 뛰어다닌다기보다는 무엇 하나 걸림이 없기에, 신이 나서 즐거워서 그렇게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른은 왜 뛰어다니지 못하는 걸까요. 어찌해서 어른은 본성에 동화된 마음을 쓰지 못하고 총총걸음만 할까요. 어린이로부터 어른의 마음으로, 어른에서 다시 어린이 마음으로. 비록 가면 또 돌아오지 않음이 없는 길이라 할지라도 자연스럽게 마음대로 신나게 뛰어다녀야 할 텐데도 말입니다, 그러한 길에서 원초적 생명력이란 다름 아닌 어린이의 심성처럼 자연스럽고 걸림 없는 마음일 때라야 가능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 봅니다. 

이런 연유에서 그렇다면 이제 어른도 머지않아 뛰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 뛸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린이가 어른으로, 다시 어른에서 아이로 가는 여정에 꼭 필요한 행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일러 성인과 현자들이 한결같이 "신(神)은 곧 어린이의 마음과 같다"라고 했고, 평소에도 어린이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일갈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이 흔치 않은 본성의 길, 원초적 생명의 길을 70세에 가까워진 나이에 친족과 함께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회고하던 그날 모임은 잊지 못할 설 명절의 추억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돌 것입니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