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안다, 알고 있다는 행위는 사물의 본질이나 상태를 인지하였거나 이해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식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경험을 통하여 인지하는 연륜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안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앎이라고 표기해 봅니다. 

이 앎은 그냥 우연히 생겨났다기보다 반복적인 학습의 과정을 통하여 성취되기도 합니다. 또한, 앎을 이끄는 방편도 의식이 안정적인가 아니면 감정적인가에 따라서 앎이나 안다는 작용이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비록 안다는 것에 뚜렷한 기준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주재하는 당사자의 생각이나 감정이 요동을 치는 경우 앎의 행위를 바르게 이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무엇을 안다는 것은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앎의 전체성에 부합하는 행위에서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측면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다는 것에 비례하여 누가 더 많이 아느냐, 나의 앎과 너의 앎 중에서 누가 더 옳은 앎이냐라는 문제로 시비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때 흔히 나오는 말이 “너는 틀렸어, 도대체 넌 아는 게 뭐니? 그 일에 대해서 너는 얼마나 알고 있니. 모르면 가만있어.” 등 입니다. 

이러한 대화를 종종 듣고 있노라면 앎, 안다는 것,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수용력과 함께 그 행보가 얼마만큼 진실과 순수를 담고 있는냐도 앎의 관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수용력이 부족하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앎이란 실체를 놓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렇다면 나는 과연 내가 안다는 그것의 진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가? 또한, 그 안다는 행위가 표면으로 나타나기까지 점철되는 내면의 결(아픔이나 고충)을 얼마나 이해하고 수용하는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 있어야 가능한데 이 앎과 모름 사이를 관통할 순수 지혜는 무엇인가 등을 탐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탐구를 거론한 것은 그만큼 앎의 영역이 한정적이어서는 안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앎과 안다는 정도를 얼마만큼 지니고 있을까요. 만약 누군가가 이를 연필로 써보라고 했을 때, 어느 정도의 분량으로 써낼 수 있을까요. 어떤 장르이든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막상 안다는 것을 써보라고 하면 의외로 망설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안다는 것의 범위를 정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안다는 것이 과연 떳떳하게 안다는 원칙(진실, 순수)에 합당한 경험인가를 갸름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앞을 못 보는 봉사가 코끼리 다리를 만졌을 때 안다는 경험을 통하여 알아차리는 방식이 각기 다르듯이 말입니다. 

어떤 분은 코끼리가 퉁퉁하다고 말할 것이고 또 어떤 분은 만져본 살결이 두터운 껍질로 되어 있어 코끼리는 두껍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면 안다는 것을 내면에 정착시키기까지에는 수많은 고뇌와 경험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앎의 보편적인 시각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조차도 안다는 것에 부합하는 실체적 진실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여전히 미흡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결국, 앎과 안다는 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언가 특별한 행보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필자는 이것을 영적 교감이라고 말해 봅니다. 이 영적 교감이 앎의 구체적 행보이자 행위 전반을 통리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사례에서 영적 교감의 구체적 실상인 자연을 배경으로 우리가 먹는 일용의 양식인 밥이 상에 오르기까지의 앎의 실체를 기술해 봅니다. 

왜냐하면, 밥 한 그릇에 스며있는 앎의 실상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앎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밥이 밥상에 오르기까지 모를 심고 거두며 절기와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고 각종 병충해에 대비하고 잡초를 제거하는 등의 헌신이 있어야 비로소 수확할 수 있습니다. 

삶의 전체성은 안쪽과 바깥, 내면과 외면으로 양분되어 바깥에서 펼쳐지는 앎을 외적인 앎이라 하고 안쪽에서 펼쳐지는 앎을 내적인 앎이라고 지칭해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앎과 안다는 것은 이 양쪽의 앎을 몸소 체득하여 나와 완벽히 하나가 될 때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희열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희열의 앎이 우리네 삶에 미치는 정도를 생각하면 안다는 것이란 참으로 소중한 지혜의 산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가 될 때라야 비로소 아는 것이요. 어느 대상과 완벽히 하나가 될 때 앎에 이를 수 있다는 이치에서 그러한 달굼에 명상이 필요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