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쌀쌀함이 깃들기는 해도 완연한 봄날입니다. 이 봄을 잇기 위해, 이 따스함을 잇기 위해 봄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인내하였을까요. 

겨우 내내 얼어붙은 대지 위로 부는 바람에 힘들어하며, 한설(寒雪)과 냉기에 움츠린 심기(心氣)를 달래면서 그렇게 봄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때로는 엄동설한 긴 밤을 고독으로 보내며 강하고 억센 비바람과 태풍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태를 유지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사계절이 순환하는 동안 거친 기상과 드센 동풍(凍風)에 휘둘리며 마음 아픈 적도 있었을 것이고, 뜨거운 햇살 아래 비지땀을 흘리며 봄 맞을 채비에 최선을 다한 열정이 있었기에, 봄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늘 다시 우리 곁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한 봄을 예찬하며 필자는 다시 오늘에서 봄을 맞습니다. 마음 씀이나 기분이 어제와는 전혀 다른 봄입니다. 오늘의 여운을 분초로 나누다 보면 찰나로 이어지는데 이 찰나에도 마음의 봄은 여전히 초연함을 유지합니다. 초연함은 생애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언제나 시작의 의미와 다짐이 깃들어 있어 새로움을 여는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찰나에 집중된 의식은 수심정기(守心正氣)로 연결되어 한층 고조된 의식을 일으키는데 천지의 기운이 나에게 수렴되는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때마침 이 순간의 수심정기에 고무된 필자는 여느 때처럼 아침 햇살을 받으며 동네 앞길을 걷습니다. 길가 곳곳에 피어나는 이름 모를 봄 야생화가 그렇게 이쁠 수가 없습니다. 

지난, 겨울 그 고뇌에 찬 날을 생각하면 이를 극복한 야생화가 기특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조우의 기쁨도 잠시, 그들의 심기 속에 겨우내 담긴 마음의 봄은 여전히 고개를 내밀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혹시나 오랜 시간, 힘듦과 고난의 여파에 지친 탓에 상실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숨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실타래처럼 얽힌 인과를 풀지 못해서일까요. 봄이 가고 봄이 오는 사이 마음의 봄을 더디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필자의 궁금증만 더해 갑니다. 혹시나 이 봄조차도 그들의 내면에 흐르는 마음 입자에 영향을 받아 피로해진 심신을 달래려 전전긍긍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동물이든 식물이든 어떤 마음을 먹는 순간, 그 마음이 바라는 대로 나타나지는 것이 입자의 원리요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마음먹는 대로 된다는 것 이것이 사람과 사람, 생명과 생명, 자연과 사람을 성장시키는 동력이자 진실이라면 이를 어찌 가볍게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에서 봄을 찾기 위한 여정에 만약 번복지심(飜覆之心) 두게 되면 역리자(逆理者)요, 물욕교폐(物慾交蔽) 되게 되면 비루자(鄙陋者)요, 헛말로 유인(誘引)하면 혹세자(惑世者)요, 안으로 불량하고 겉으로 꾸며내면 기천자(欺天者)라, 마음이 번복하고, 물욕에 집착하거나 헛말로 유인한 혼란으로 마음의 봄을 볼 수 없다면, 이 안타까움을 어찌하겠습니까? 

여느 생명이든 각각의 생령(生靈)에 저장된 마음의 세계. 거기에는 누구나 한 차원 높은 의식 세계를 담아야 한다는, 차원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그러한 과제를 내어준 봄의 의지가 감사하기 조차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의식이 정해진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봄을 지탱할 근거가 된다니. 그렇다면 이처럼 귀중한 사명을 우리가 어찌 도외시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결국, 내 안에 깃들어진 인습의 잔재를 거두고 한 차원 높은 의식으로 나아가야 만이 마음의 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사계절을 순환하면서 어떤 역경이 와도 봄을 이끌 의지를 굽히지 않는 봄의 입자처럼 말입니다. 한 생각의 입자는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요, 전체 생명에게 똑같이 적용됨은 기연(其然)이면서 불연(不然)의 원리입니다. 바라보면 있는 듯(기연, 其然)이 보이지만 바라보지 않으면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가 기분이 좋으면 봄도 기분이 좋을 것이요, 내가 기분이 나쁘면 봄 역시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내 마음이 화평하지 않으니 봄이 올 리 없고, 마음이 시끄러우니 봄의 펼침도 소란스러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과 사람, 생명과 생명, 자연과 사람 간에 봄을 만나기 위한 지기(至氣)의 약동이요 질서라면, 한층 출중한 마음 입자를 가진 우리가 이를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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