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승놀이와 양반놀이, 서민생활을 보여주는 놀이를 더 세분하여 ① 벽사(辟邪:귀신을 물리치는 것)의 의식무와 굿, ② 파계승에 대한 풍자, ③ 양반에 대한 모욕, ④ 남녀의 대립과 갈등, ⑤ 서민생활의 실상과 애환 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의 특권계급과 형식적인 윤리에 대한 일종의 비판정신을 구체적으로 연출하는 민중극이며, 세계 어느 나라의 민속극에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의 약점이나 시류의 악폐, 당시에 호사를 부리던 계층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패러디(parody)인 바, 이러한 서민문학성은 임진·병자 양난 이후 새로 일어난 서민문화의 주류를 이룬 사조로서 서민예술의 하나인 탈놀이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러나 각 놀이마다 주체성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예컨대 남녀관계 설정에서 봉산탈춤·오광대·꼭두각시놀음 등은 남녀의 갈등을 강조하여 영감과 미얄과 그 첩과의 삼각관계를 다룬 데 비하여,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신할아비과장에서 부부관계에 첩을 등장시키지 않는 대신 샌님과장에서 샌님〔生員〕·포도부장(상민)·샌님의 소첩과의 삼각관계로 이를 설정하여 남녀의 갈등보다 양반과 상민의 대립관계에 역점을 두어 양반에 대한 모욕을 더욱 날카롭게 하고 있다.

이것은 지방에 따른 계급 차별에 대한 자각과 남녀 차별에 대한 자각과의 차이로 보인다. 또 중부와 서북지방의 탈놀이에서 파계승에 대한 풍자과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데 비하여, 영남지방에서는 파계승에 대한 풍자가 약한 대신 양반에 대한 모욕이 심하여 취발이 대신 말뚝이 재담이 중심이 된 느낌이다.

탈놀이의 연희자는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직업적인 연희자들이 서울 남대문 밖의 큰고개·애오개〔阿峴〕, 서대문 밖의 녹번리 등지에 살면서 각 지방을 돌며 흥행하였고, 일례로 사직골 딱딱이패가 노는 본산대를 본떠서 오늘의 양주별산대놀이가 생겼다고 한다. 또 낙동강변의 밤마리 장터에서 놀던 대광대패의 탈놀이가 그 일대에 퍼져 오늘의 오광대와 야류로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전하는 가면극은 비직업적인 반농반예(半農半藝)의 연희자들에 의해 연희되어 왔다. 이속(吏屬)이나 무부(巫夫)가 주도하던 고장이 많았고, 농민 뿐만 아니라 황해도탈춤에서는 상인들도 많이 참가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연희자는 모두 남자였고, 봉산탈춤에서 상좌나 소무역을 여자가 맡아 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오면서 기생들이 참가한 뒤부터였다. 또 양주에서는 일단 탈을 쓴 자는 제사에도 참여할 수 없어 이를 꺼리기도 했다는데, 이것은 탈이 잡귀뿐만 아니라 조상신까지도 쫓는다고 생각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연기자가 탈을 써서 등장인물을 나타내며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탈놀이라면, 탈은 탈놀이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탈은 각 지방의 12가지 탈놀이에 따라 제각기 다른 표정의 탈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수가 매우 많다.

탈 제작의 재료로는 나무와 종이, 그리고 바가지가 가장 많이 쓰인다. 중부지방의 산대탈은 주로 바가지이고, 황해도지방의 탈은 종이를, 영남지방의 오광대와 야류탈은 종이와 바가지를 주로 사용하고, 대바구니와 모피도 사용된다.

≪증보문헌비고≫ 권64 나조(儺條)에 보면, 1623년(인조 1)에 궁중에서 나례에 종이가면을 쓰면 비용이 많이 드니 나무가면으로 바꾸어 매년 개장(改粧)만 해서 쓰기로 논의된 사실이 보이는데, 민간에서는 봉산탈춤 등 황해도탈은 종이가면이나 산대탈은 오래 전부터 바가지탈이었던 것 같다.

하회별신굿탈놀이를 제외한 모든 탈놀이는 공연 뒤에 부정을 꺼려서 탈과 소도구 등을 태우거나 부숴 버리고 행사 때마다 새로 만들었으나, 금세기에 들면서 양주별산대놀이의 경우만 하더라도 탈을 사직골 신을 모셔 놓은 당집에 보관하고 해마다 개장해 써왔다고 한다.

탈의 색은 붉은색·검은색·푸른색·노란색 또는 갈색·흰색 등의 오방색이 주로 쓰이는데, 그 색이 갖는 의미도 민간신앙적인 면에서 설명되기도 한다.

봉산탈춤의 목중탈 같은 것에 비하여 양주나 송파의 산대탈은 보다 사실적인 탈들이며, 탈 뒤에는 탈보가 붙어 있어서 이것으로 머리에 동여매고 후두부까지 가리며 얼굴 전면을 덮게 되어 있다.

사용되는 탈의 수는, 양주별산대놀이를 예를 들면 상좌 2개(첫 상좌는 도련님역을 겸용), 옴중 1개, 목중(또는 먹중) 4개, 연닢·눈끔적이·완보(또는 관을 쓴 중)·신주부·왜장녀(해산어멈과 도끼누이를 겸용)·노장 각 1개, 소무(애사당을 겸용) 2개, 말뚝이(신장수와 도끼를 겸용)·원숭이·취발이(쇠뚝이 겸용)·샌님·포도부장·신할아비·미얄할미 각 1개로 모두 22개 내외가 된다.

각 탈은 제각기 일정한 도형을 가지고 있어 그 기본 바탕에 의해서 제작되나, 재료가 주로 종이거나 바가지이므로 그 모양은 제작자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지만 보다 편법화된 수법은 조선시대적인 민예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 등 중부지방 탈놀이의 의상은 대체로 양반이나 중, 서민 남녀 등 등장인물들의 의상과 소도구는 조선 후기의 그것과 같으나 배역에 따라 특수한 상징적인 특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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