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놀이”는 고려 시대에 발생하여 조선 시대에 발전한 가면극 놀이로 ‘산대(山臺)’란 산대 놀음을 하기 위해 마련한 임시 무대를 이른다. 한길가 또는 빈 터에 대를 높이 쌓고, 그 위에서 연극 등을 하였다. 탈을 쓰고 소매가 긴 옷을 입은 광대가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노래와 재담(才談)을 곁들인다. 양반과 파계승(破戒僧)에 대한 풍자, 남녀의 삼각관계, 서민 생활의 어려움 등이 주를 이루며, 대체로 12마당으로 구성되었다. 

모닥불이나 기름불로 조명하였으며, 탈막은 탈이나 옷을 갈아입는 곳으로 전체를 백포(白布)로 둘러싸고 탈판으로 두 개의 출입문이 있어 연기자들이 입퇴장하는 데 사용하였다. 봉산탈춤의 탈판은 탈판 둘레에 다락을 만들어 특별 관람석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가무극의 연희 형태는 음악 반주에 의한 춤이 주가 되며, 거기에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 부분과, 몸짓과 덕담·재담이라고 하는 사설, 즉 대사가 따르는 연극적 부분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가면극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산대놀이’로서 애우개(阿峴洞, 아현동)· 노량진·퇴계원·녹번리·구파발·송파 등지에 흩어진 ‘산대패’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가면극은 그 내용이나 형식면으로 보아 선행예능이 되어 준 ‘가면희’와는 달리 서민취향화(庶民趣向化)된 것이었는데, 이를 ‘본산대(本山臺)’라 부른다.

처음 서울 및 근교에서 시작된 산대놀이는 각 지방으로 전파되었고, 그 지방의 독특한 스타일로 발전하여 경기 지방의 ‘양주별산대놀이’, 황해지방의 ‘봉산·강령·해주의 탈춤’, 경남지방의 ‘동래·수영의 야유(野遊:冶遊)’, 일정한 고장이 없이 유랑하며 연희하던 ‘남사당의 덧보기’, 다소 계통은 다르나 함경도 지방의 ‘북청사자놀음’, 경북 지방의 ‘하회별신굿놀이’, 강원도 지방 ‘강릉관노탈놀이’ 등으로 갈라졌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오래전부터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는 세계화의 길을 걸으면서 지구촌 신명을 이끌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오래전부터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는 세계화의 길을 걸으면서 지구촌 신명을 이끌고 있다

우리나라 가면극은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과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으로 나눌 수 있다. 학자들은 애오개·사직골 등에 있었던 산대놀이를 흔히 본산대놀이라고 하는데, 이는 양주와 송파 등지의 별산대놀이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본산대놀이는 반인들이 조선 후기에 서울 근교에서 삼국시대 이래 전승되어 온 산악·백희 계통의 가면희와 연희를 재창조 해 만들어 낸 가면극이다.

우리나라 가면극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은 산대희, 즉 산악 또는 백희라고 부르던 연희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 산악 또는 백희라고 부르던 연희를 우리나라에서는 백희·가무백희(歌舞百戲)·잡희(雜戲)·산대잡극(山臺雜劇)·산대희(山臺戲)·나례(儺禮)·나희(儺戲)·나(儺) 등으로 불러왔다.

이러한 명칭들은 이 연희들이 산대라는 무대 구조물에서 연행되었고, 또 나례에서도 연행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현재 전해오는 가무극 상연 시기는 각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음력 대보름과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팔월 추석 등의 명절놀이와 나라의 경사 때나 기우제 행사로도 동원되어 놀았다. 상연 시간은 민속예능의 일반적 특성으로 제한이 없어 보통 저녁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시작하면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서너 시간으로 줄이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탈놀이의 대사가 구전(口傳)되어 오는 것으로 일정하지 않아 전체적인 틀이나 짜임새는 있으나 세부에 들어서는 신축이 자유로운 점과, 또 춤 역시 신축이 가능한 데서 오는 것이다. 현대로 내려오면서 줄이는 경향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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