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평(席坪)리는 다정리와 무림리 사이에 있는 넓은 벌말로 건너편 난음리에 있는 비자당의 동산이 배를 엎어 놓은 모양과 같고 배의 돛이 들판을 덮은 것 같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석평리는 돗 석(席) 들 평(坪)자를 쓴다. 우리말 이름은 돗들이다. 돗은 돌, 덫, 돼지를 이르는 고어이지만 배의 돛과는 다른 말이다. 훈몽자회에서는 돗 석(席)자는 돗자리를 말하는 것으로 돗틀로 짠 돗자리와 가는 끈으로 엮은 자리로 구분하였다. 드물게 배에 다는 돛을 뜻하기도 하지만 돛은 한자로 돛 범(帆)자가 따로 있고 돛단배를 범선이라고 한다. 따라서 석평은 돗자리처럼 넓은 들이며 돋아진 들, 높은 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석평리에는 청깃모, 바랑밭, 정골, 웃정골,청룡촌, 삼밭골 등의 뜸이 있다. 삼밭골은 마전촌(麻田村)으로 삼을 재배하던 곳을 이르는 지명이며, 정골은 가마솥을 만들어 파는 점포가 있어 점하촌과 점상촌을 이르는 지명이다. 바랑밭은 보랑밭이라고 하며 스님이 메고 다니는 바랑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청룡촌은 북쪽에 있는 용을 닮은 산등성이 아래 있는 마을을 이르는 지명이다.

석평에는 글씨기몽팅이라는 매향처가 있다. 글씩이몽팅이는 글이 쓰인 모퉁이의 방언이며 북쪽에서 바다로 내리뻗은 산모퉁이와 바다가 만나는 자리에 있었던 바위에 “매향우두용포하 용화미륵헌불전(埋香于頭龍浦下 龍華彌勒獻佛前)” 향을 두룡포아래 묻어서 미륵부처님 전에 바친다는 글귀가 있었는데 그 바위는 도로공사를 할 때 없어지고 매향처라는 이름만 남아있는 곳이다. 

매향은 내세의 복을 빌기 위해 향을 땅에 묻는 행사를 말하며 향을 묻은 곳을 매향처라고 한다. 불가(佛家)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매향의 최적지는 계곡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어야 하므로 매향을 할 때는 향나무를 아무 곳에나 그냥 묻는 것이 아니라 섬이나 해안지역(海岸地域)이어야 하며, 구체적으로는 개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 묻히는 나무는 향나무는 물론이고 소나무 참나무 등이었으며, 이를 흔히 침향(沈香)이라고도 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는 매향으로 만들어진 향은 침향이 아니다. 침향은 본래 물에 가라앉는 무거운 나무라는 뜻인데 매향(埋香)으로 만들어진 향이 침향으로 통용되는 것은 무겁키도 하지만 침향과 같이 가장 좋은 향으로 바뀌라는 염원이 배어있는 것이라고 한다.

무림(茂林)리는 무성할 무(茂) 수풀 림(林)자를 쓰니 숲이 우거진 마을이다. 원래는 석평리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분동되어 별원리(別原里)가 되었다가 정거리, 양지마을, 봉곡을 합하여 새로 지은 지명으로 이동면의 중심지역이다.

정거(停車)리는 고려 말 난음리에 살던 백이정선생의 가마가 이곳에 자주 머물렀다하여 머무를 정(停) 수레 거(車)자를 써서 정거리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정거라는 말은 조선 말기에 사용된 것으로 보아 후대에 생긴 지명으로 보인다.

봉곡(鳳谷)마을은 뒷산에 봉암사라는 절이 있어 지은 지명이라 하며, 한자로는 새 봉(鳳) 골 곡(谷)자를 사용한 것을 보면 새골이나 새방골이라고 볼 수가 있다.

성현(城峴)리는 마을 앞에 깊은 골짜기가 있고 옛 산성이 있어 지은 지명으로 성고개(城古介, 城高介) 마을로 역사가 오래된 마을이다. 성현리는 잣 성(城) 고개 현(峴)자를 씀으로 고유 지명은 잣고개마을이다. 옛날에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이동면 신전에서 시작하여 복곡, 금산, 내산, 대지포, 수장포 까지 연결된 총길이 15km의 민보산성(남해장성)의 중심지역이다. 성현 마을의 성고개성, 화계마을의 곡포성, 두모마을의 고진성 평산마을 평산이 연계된 외곽방어용 성으로 삼동면 수장포와 대지포 사이에는 직선으로 연결이 되어 있고 전체적으로는 팔자형태를 뛰고 있으며 남해장성이라고도 부른다. 앵갱이 곡으로 불리는 이곳은 고개가 높고 구비 돌아가는 길이라 사고도 많이 나고 넘기도 힘든 곳이다.  

고진성의 터가 남아있고 고진 안에는 옛날 옥사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군민 동산을 조성하여 참전 용사를 기리는 탑이 서 있고 용사들의 명단이 빼곡하게 적혀있는 비가 서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성현에 대한 자료를 정리해 보면 문종1년(1451) 경상도 남해현 성현(南海縣城峴)의 수어군(守禦軍)의 수는 3백 명뿐으로 2번(番)으로 나누어 서로 교체하므로 괴로움이 다른 데에 갑절이나 되니 참으로 온당하지 못합니다. 원래의 군사 3백 명과 거제, 남해의 정역(定役)이 없는 사람 51명을 추쇄하여 아울러 3백 51명에다가 남해 부근의 각 고을에서 원수(元數) 외의 일수(日守) 및 한량(閑良)과 적(籍)에서 빠진 인정(人丁) 49명을 찾아 4백 명을 만들어 4번(番)으로 나누어 방수(防戍)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단종2년(1454)에는 남해 망운산과 성현의 두 봉화를 혁파하고 그 군인들은 성현 방호소(城峴防護所)에 옮겨 붙이었다.

세조13년(1467)에는 남해진(南海鎭)은 절도(絶島)라서 사면으로 적의 침입을 받게 되는데 현의 남쪽 성현(城峴)을 적로(賊路)의 요충지(要衝地)로 여겨 모든 군사가 다 이곳을 방어하지만, 관부(官府)의 군량과 병기는 성안에 있는데도 이것을 지키지 아니하니, 봉수(烽燧)를 삼가고 멀리 척후(斥候)를 보내고 군사들은 모두 성 안을 지키게 하였다. 예종1년(1469)에는 남해성현(南海城峴)의 요해처(要害處)에는 두 연대(煙臺)를 두고 1대마다 군사 6인으로 하여금 후망(候望)하게 하였으며, 성종19년(1488) 미조항은 남해현과 거리가 90여 리인데 성고개(城古介) 이북은 사람이 살고 있고 전지도 있으나 성고개 이남에서 미조항까지 60리 지역은 숲이어서 풀이 많고 인가가 전연 없으나 육지의 물이 있는 곳이어서 왜선이 왕래하며 여기에 머물기 때문에 진을 설치하면 왜적의 왕래를 막을 수 있다. 

성종19년(1488) 성고개(城古介)에 방수(防戍)가 있고 그 사이에는 거민(居民)이 없습니다. 성종19년(1488) 사변이 있으면 거리가 멀어서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근처에는 거주하는 백성이나 농토가 없는데 공연히 방수(防戍)하는 것은 이익이 없습니다. 

중종5년(1510) 적(賊)이 만약 큰 세력으로 온다면 작은 보루의 병력으로는 버티기 어려울 것이니 우도에서는 우고개(牛古介)를 성고개(城高介)에 합하고 율포(栗浦)는 지세포(知世浦)에 합하여 대변(待變)하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성고개는 남해안을 방어하는 중요 요충지이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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