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상 봉 작가
백 상 봉 작가

다정리(茶丁里)는 괴음산에서 흘러내린 입현천과 송등산에서 흘러내린 다천천 사이에 있는 마을로 들에 작설차(雀舌茶)밭과 정자가 있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다천과 금석마을을 합하여 다정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옛 지명은 다정천리(茶亭川里)였다. 다정천리는 차 다(茶) 정자 정(亭) 내 천(川)자를 쓰는 마을로 물이 흐르는 냇가에 차나무가 많았거나 정자가 있었던 마을로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물이 귀해 모린내라 불리는 냇가에서 차를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며 지금은 차 다(茶) 고무래 정(丁)자로 바꿔 한자의 의미를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금석(金石) 마을은 쑥골모라 불리는 곳으로 산자락에 용소가 있어 소골마을이라 하였다. 한자로는 쇠 금(金) 돌 석(石)자를 쓰니 고유음으로 읽으면 쇠돌이다. 아무튼 금석이라는 부자가 들어와 살면서 부르게 되었다고 하나 쇠돌이가 부자가 된 마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을 북쪽에는 군사훈련을 하던 연병장 터가 있다.

다천(茶川) 마을의 옛 지명은 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탑골로 불리었다. 마을에는 다천사라는 원효대사가 세운 절이 있었으나 남아있지 않고 차에 관한 다른 지명도 남아있는 곳은 없다. 절이 없어져 차 문화도 사라지고 이름만 남았지만 차를 나눠마시던 정은 남아있어 정이 많은 다정(多精)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분대(分帶) 마을은 읍의 갓곡마을과 이동면의 경계에 있는 입현천 가에 있는 마을로 허리띠처럼 길게 늘어진 마을이라고 한다. 하지만 분대는 분두와 혼용되는 말이다. 분두는 흙이나 거름을 담아 나르는 삼태기를 말하는 것으로 작은 마을을 의미하기도 한다.

초면(草面)리는 마을 부근 일대가 풀밭 이었던 까닭에 옛날부터 전해오는 지명은 새면(새민)마을 이었다. 주민들이 늘어남에 따라 초면의 골짜기 마을은 초곡(草谷)마을, 양지편 마을은 초양(草陽)마을, 음지편 마을은 초음(草陰)이 되었다. 초사구는 초음, 광두, 고모 1구, 초곡 초양 2구, 다정, 금석 3구, 다천 4구를 포함하는 말이다. 

초면리는 새 초(草) 낯 면(面)자를 쓰며 고유지명은 새면, 새민으로 읽는다. 시골에서는 지금도 억새나 속새 풀을 새라고 한다. 따라서 풀이 지면을 덮은 곳이 초면이고 새면이다. 풀이 가득한 풀밭이나 억새밭은 초전이나 초원이 어울리는 말인 대도 초면으로 한 것은 풀 낯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다. 풀 낯은 지푸라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짚과 풀은 같은 의미로 쓰였으며 곡식을 떨어내고 남은 짚풀이 늘려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본다. 풀 낯은 봄에 풀이 돋아나는 것 보다는 가을에 풀이 흩날리는 것을 연상시키는 말이다.

초양마을은 새면의 양지편에 있는 마을이기에 새 초(草) 볕 양(陽)을 써서 새볕마을로 볼 수도 있다. 1953년에 초음에서 분리 되었다. 남해에서 두 번째로 큰 들인 장밭들은 초음 초곡 광두 사이에 있는 들이다. 들에 물을 대는 새민못(장평저수지)의 수문 역할을 하는 곳이라 해서 수문등(水門墱)이라고도 한다.

초곡마을은 초음마을에서 분동된 마을로 새 초(草) 골 곡(谷)자를 쓴다. 달구산(月狗山, 닭산) 동남쪽 골에 있는 마을로 샛골로 불린다. 마을 동쪽에는 옛날 군인의 지휘관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군두(軍頭)앞으로 부르는 곳이 있다. 마을 서쪽 다정마을 초입에는 초곡저수지가 있다 

고모(顧母) 마을은 초음에서 분리된 마을로 옛 이름은 꼬막개였으며 마을 뒤에 도우산(到牛山)은 마을의 형상이 송아지를 닮아 어미를 돌아본다는 뜻으로 돌아볼 고(顧) 어미 모(母)를 써서 고모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에는 가꼬막개, 꼬막산, 큰 꼬막, 작은 꼬막이 있는 것을 보면 고모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본다. 

광두(光頭)마을은 옛날부터 광머리나 강머리로 불리는 바닷가에 있는 마을이다. 지형이 사람의 머리 형상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여객선이 닿았던 곳은 강머리(江頭)라고 부른다.

읍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이동면으로 들어서면 남해마늘연구소 도로 맞은편에 꽤 넓은 저수지가 있다. 이름은 장평 소류지이지만 남해 사람들에게는 새민 못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이 못에는 역사를 알 수 있는 초곡장평저수지류지기공비(草谷長評貯水池溜池起功碑)가 소류지 동쪽 제방 가운데 서 있다.

장평소류지는 순조7년(1807) 현령 채익영(蔡翼永)이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고자 착공을 지시해 관개에 쓰도록 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준설과 제방의 중수가 이뤄졌고 1951년 전후해서 보강 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류지에서 읍 쪽으로 30여 미터 내려온 길 오른편에는 큰 바위 마애비에는 주민들이 그들의 공적을 잊지 않기 위해 현령 채익영과 서기은, 성두식, 이시봉의 불망비(不忘碑)가 새겨져 있다. 서홍 이시봉(李時鳳)은 이 지역 출신 유지로서 사재를 내어 공사를 주도하고 남해향교의 전교, 노량 충렬사의 시설 공사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평저수지에서는 해마다 4월이면 튤립축제가 열린다. 18만여 송이의 아름다운 튤립과 주변에 무리로 함께 피는 유채꽃과 새민 못둑의 벚꽃은 저수지의 수면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절경을 선물한다. 뿐만 아니라 일출도 함께 볼 수가 있어 이동면의 대표축제로 자리 잡았다. 튤립축제가 벌어지는 새민못 둑에는 벚꽃 나무가 많아 옛날부터 봄놀이 터로 유명하고 사진 찍기의 명소로 소문나 곳이다. 국도 19호선 확장공사로 인하여 중단 되었다가 다시 열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남해군 농업기술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남해농업기술센타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마늘 연구소, 마늘나라, 보물섬 식물원, 원예특작과학관, 지석묘, 탈 공연 예술촌 등이 있다. 특히 탈 공연 예술촌은 이동면 초음리 옛 다초 분교 터 1만2천㎡에 72억 원을 들여 2008년에 개관한 종합문화 예술 공간이다. 실험극장, 탈 전시장, 탈 박물관, 영상 자료실, 도서실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예술촌 마당에 설치된 이동식 야외무대 시설은 공연무대로 사용토록 했다. 전 동국대학교 예술대학장 김흥우 박사가 기증한 국내·외 탈 515점과 서적 1만6천200점, 공연예술자료 7천100점, 영상자료 3만2천400점 등 모두 19종 5만6천300여 점이 전시돼 있으며 매년 예술제가 열리고 있어 남해의 대표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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